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로피컬 박 Mar 19. 2021

선유도 좀비 9화. 스페인 록 페스티벌과 좀비

선유도 좀비


케이트가 스페인에서 록 페스티벌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순전히 P 때문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국경 해안을 넘어 스페인 빌바오라는 도시의 작은 호텔방에서 쉬고 있던 케이트와 P. 케이트는 임무에 쏟은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CD플레이어에 가장 좋아하는 재즈 CD를 넣었다. 신기한 일은 온몸이 부서져도 CD플레이어만큼은 부서지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온몸이 부서졌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또 참고로 말하자면 케이트의 인생에는 은유는 거의 없었다.



CD플레이어의 CD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케이트는 이어폰을 꽂았다. 그때 P가 혀를 차는 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늘 그렇듯 P는 그런 케이트를 보며 아날로그 인간이라며 놀릴 것이 뻔했다. 케이트는 P가 입을 떼기도 전에 대답했다.



"칼도 아날로그야. 난 아날로그가 좋아"

"누가 뭐래?"



케이트는 P가 구시렁거리는 너무 뻔하지만 정겨운 그 입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이 본터라 오늘만큼은 생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내전이 끝나지 않는 처절한 땅에서 지하에 숨은 이들을 비행기로 구출하는 작전은 몸과 머리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순간 속에서 각각의 에너지가 오차 없이 재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자신이 칼을 쓰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길 바라는 찰리의 시선이 과도하다고 느꼈다. 0과 1의 연속성이 만드는 디지털 세계의 무한함이 가끔은 완벽해 보여도, 끝이 보이지 않아 숨이 막히는 것처럼. 그래서 케이트는 계속해서 변주하는 재즈가 좋았다. 자신도 변주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칼 좀 쓴다는 애가 그렇게 흥이 없어서 쓰냐"


P의 그 말에 케이트는 애써 뜨지 않으려 했던 눈을 떴다. 칼과 흥의 연관성 혹은 공통점은 음절이 하나라는 것뿐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곧 케이트는 후회했다. 그 말은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케이트 앞에 P는 어디서 났는지 A4보다 약간 큰 빳빳한 재질의 주황색 전단지 하나를 호기롭게 내려놓았다. 전단지에는 '빌바오 록 페스티벌'이라는 영어 단어가 굵은 검은색 글씨체로 쓰여있었고 그 아래로는 각기 다른 글씨체의 단어와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케이트는 전단지만 봐도 시끄럽고 정신없는 음악들이 재생되는 것 같아 어떻게든 멈춤 버튼을 찾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로 케이트는 전단지를 곱게 접어버렸다.



"빌바오에 왔고 내일이 이 페스티벌 시작일이라면 가는 게 도리야"



P는 확신에 차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서 제발 같이 사달라며 무릎 꿇고 비는 P가 보였다.



"우리가 도리 따지면서 일하는 사람은 아닐 텐데"



케이트는 거절과 동시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케이트는 Q와 함께 록 페스티벌에 함께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힘겹게 국경을 넘고 국경을 넘기 전에는 족히 20명은 넘는 적의 피를 본 오늘, 생각 자체가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케이트는 Q와 함께 록 페스티벌에 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일까. 케이트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선유도역 앞에서 누군가에 의해 몸이 들어 올려질 때 그 확신의 이유를 깨달았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높은 데시벨의 빌바오 페스티벌 공연 속에서 P는 어느 순간 관객들에게 들어 올려져 사람들 머리 위로 떠다니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 순간 행복해하는 P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4년 후 자신이 선유도역 마트 앞에서 P처럼 사람들 위를 떠다니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이 순간 케이트는 그날 P가 그렇게 아이처럼 웃는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페스티벌에 간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들고 있는 이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를 원한다.


"케이트! 여기야!"



케이트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같이 사람들에게 들려 어디론가를 향하는 수요일이 있었다. 그리고 더 멀리 페니도 있었다. 이제야 케이트는 깨달았다. 자신들을 두 손 높여 들어 올리고 이동시키는 정체가 검은색 후드티라는 사실을. 그런데 후드티 무리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검은색 후드티 무리들은 길 한복판을 가득 채웠고 길이로는 적어도 30미터 넘게 긴 행렬을 이뤘다. 누가 봐도 그들은 케이트와 수요일, 페니를 보호하고 있었다. 후드티 무리의 끄트머리에 있는 일원들이 목숨을 다해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은 처절했다. 사실 상대라고 하기에는 무리다. 차라리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케이트는 생각했다. 이들이 왜 우리를? 그때 케이트는 멀리 페니를 바라봤다. 페니는 울고 있었다. 무서워서일까. 아니었다. 케이트는 지금껏 두려움에 흘리는 눈물을 많이 봐왔지만 페니의 눈물은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페니는 자신을 들어 올린 이들 중 한 명의 손을 잡고 있었다. 평소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페니의 성격을 알기에 케이트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의아하다고 느꼈다. 하얀 페니의 손과 더 하얀 누군가의 손. 주름지고 혈관이 튀어나온 그 손은 분명 나이 든 여자의 손이었다. 12시 22분으로부터 겨우 3분이 지난 시간, 선유도를 비치는 햇살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9화 끝

이전 08화 선유도 좀비 8화. 다시 만난 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