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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23. 2021

선유도 좀비 12화. 핑크골드색의 금고

선유도 좀비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결과로 판단된다. 늘 과정을 중요시하며 살아온 박경은 그 사실에 최근 몹시 혼란스럽다. 남들처럼 눈에 보이지 같은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는 패배감. 아침에 눈을 뜨면 늘 그 패배감이 박경의 가슴 위를 눌렀다. 직업이 없으니 생활고는 지속되어가고 결혼은커녕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성이 없다는 결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박경은 하나의 '결과'일뿐이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 같은 것은 박경의 주변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모습들은 패배감이 되어 다시 박경의 가슴을 눌렀다.

잡코리아에 들어가 눈이 빠지도록 구인 공고를 훑어보고 이력서를 내봐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그 과정, 생활비가 부족해 임상실험 테스트 참여자 구인 공고에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그 과정, 1시간 40분이나 걸려 찾아간 그곳에서 약을 주입받고 쇼크로 기절해 테스트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던 그 과정. 이 과정들을 박경은 주변인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 믿었으니.


그러나 박경이 임상실험에 다녀온 이야기를 수요일과 케이트 그리고 페니에게 무용담 말하듯 웃으며 흘렸다면. 그곳에서 본 이상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약에 취해 저러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결론짓지 않았다면. 괴물을 만들어 백신을 유통시키고 돈을 벌려는 대형 제약회사 아니 그보다 더 큰 조직이 있을 거라는 것을 누군가는 눈치챘을지 모른다.

게다가 늘 실패하지만 그 과정들이 결코 쓸모없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박경은 알았을 것이다. 더불어 혼란스러운 현재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같았을 수도 있지. 박경이 임상실험 테스트에서도 실패한 날로부터 2주가 지난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12시 35분, 수요일이 목에 피를 흘리며 거실로 들어서는 일은 반드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 게 바로 '결과'이다.


"문 열어요! 어서요"


케이트의 목소리였다. 현관 밖에서 칼을 쥔 케이트를 보고 잠시 뒤로 자빠져있던 박경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케이트는 재빠르게 검은 심장이 꽂힌 칼을 집안으로 던졌다. 박경은 칼이 자신의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몸을 옆으로 돌려세웠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는 없었다. 케이트 뒤에 서있던 수요일과 페니의 모습 때문이다. 수요일의 목을 붙잡은 페니의 손에는 피가 흘러넘쳤고 부축을 받고 있는 수요일의 얼굴은 회색빛이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박경은 자신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도 모른 채 웅얼거렸다.


"수건! 얼른요!"


페니의 다급한 말에 박경은 화장실 선반에 놓여있던 수건을 기억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상황에서도 박경은 선반 꼭대기에 놓인 주사위의 존재감을 의식했다.

박경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페니와 케이트는 수요일의 목에서 나는 피를 지혈했다. 박경은 어떻게  것인지  묻고 싶었고 대답을 들을  없다면 그냥 쇼크로 기절하거나 담배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말로보 레드  개비면  가지는  번에 해결된다.    말로보 레드  개비를 연속으로 피다가 쇼크로 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경은 수요일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뭐라고요?"


박경은 수요일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수건이  필요한 같았지만 수요일의 말을 듣는 것이 먼저라고 여겼다.


".. 주사.."


힘겹게 수요일이 말을 이어갔다. 페니도 수요일이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베.. 란.."


'주사' '베란'... 박경은 그것이 베란다와 주사위를 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썸을 타는 상대가 자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깨닫는 미련 곰탱이가 수요일이 말한 단어들은 이렇게 빠르게 눈치를 채다니. 박경은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자신에게 뽀뽀라도 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선반 위에서 자신이 발견했던 주사기들을 꺼내 거실에 내려놓았다. 그다음은 베란다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베란다에는 바닥이 살짝 꺼져있던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여겼다. 부디 있어야만 한다.


박경은 베란다 바닥의 장판을 떼어냈다. 하지만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박경은 도구를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요일을 지혈하던 케이트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현관 앞에 내동댕이 쳐있던 칼을 들었다. 아직 미세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칼에서 빼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고는 베란다 장판 위를 긋기 시작했다. 덕분에 장판은 손쉽게 떼어졌고 베란다 바닥 위에 작은 정사각형의 금고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핑크 골드 컬러의 금고는 그 위에서 금고를 내려다보는 박경의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그 뒤로 베란다 창문에서 매달려 박경과 케이트, 거실에 있는 수요일과 페니를 바라보는 괴물을 비췄다. 박경은 이제야 처음으로 괴물의 눈을 마주한다. 임상실험 테스트 장소에서 약에 취한듯한 그 사람들의 눈도 그 모습이었음을 깨달으며 금고의 문에 손을 뻗었다.


1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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