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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30. 2021

선유도 좀비 14화. 그 날 이후 420일

선유도 좀비



14화


박경은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담배를 다 헤진 브래지어 안으로 집어넣었다. 먹을 것을 찾으러 케이트와 함께 나간 페니가 돌아오면 라이터를 빌리리라 마음먹으면서. 세수는 하지 않아도 눈썹을 그리던 박경은 이제 숯 없는 눈썹에도 익숙해졌다. 선유도를 좀비가 점령한 지 420일이 지나는 동안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손목시계의 약이 아직 떨어지지 않아 시간을 늘 확인할 수 있다는 것과 시력이 좋아 높은 곳에서 맨 눈으로 전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물들이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로 진입하는지 안 하는지, 선유도역 지하에서 기어올라오지는 않는지 말이다. 이 사태에 정부는 최선을 다했지만 수많은 인력들이 이미 괴물이 되었기에 민간인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그런 건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건 한 끼의 음식과 물이다. 투샷 아메리카노, 치즈떡볶이, 마카롱, 돼지 목살, 짜파게티 등도 함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박경은 이런 잡념들로부터 눈을 감았다.


수요일이 가지고 있던 물약은 괴물에게 물려도 괴물이 되지 않는 약이었다. 아주 긴 설명이 필요했던 세 사람에게 수요일은 짧고 굵은 브리핑으로 이해를 도왔다. 600년 전 수요일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좀비로 변했고 그에게 물리기 전 그 물약을 먹었다고 했다. 물약을 만들자고 했던 것은 '자신이 알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박경은 '자신이 알던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낼 때 수요일의 표정에서 슬픔을 읽었다. 자신이 좀비가 된 것에 슬퍼하는 이가 600년 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 좀비는 알까. 안다면 좋을 것을.


수요일이 '자신이 알던 사람'에게 물린 그날, 정신을 잃었고 어느 순간 눈을 떴다고 했다. 초가집의 천장이 보이는 그 순간 수요일은, 괴물이 되느니 옥황상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그러나 괴물도 되지 않았고 옥황상제도 없었다. 그곳은 가까스로 생존자들이 모여있는 허물어져가는 초가집이었다. 꼬박 열흘 가까이 잠들어있던 수요일은 생존자들을 위해 물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더 이상 주변 사람을 잃지 않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찾기 어려웠다. 언제 만날지 모를 괴물들을 피해야 했기에 밖으로 나가기 힘들었고 나간다 하더라도 재료를 못 찾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더욱 큰 문제는 수요일이 점점 괴물이 돼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 것이다. 물약을 더 마셔야만 사람처럼 살 수 있었다. 결코 괴물로 죽을 수는 없었으나 만약 괴물이 된다면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죽어야 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똘똘하게 생긴 소녀에게 칼을 쥐어주고 자신의 목, 동맥이 지나는 곳에 꼬마의 손을 올렸다.


"내가 만약 괴물이 된다면  칼로 여기를 깊게 찌르렴"


그 사이 생존자들은 흩어졌다. 수요일의 물약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요일은 나가면 죽을 것이라 경고하고 빌어도 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칼을 쥔 소녀 빼고는 말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수요일은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고 포기했다. 그때 소녀가 목숨을 걸고 수요일이 준 칼을 활용해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녀는 재료를 구해 온 직후 괴물에게 물렸고 수요일은 있는 힘을 다해 물약을 만들어 소녀를 먹이고 자신도 들이켰다. 다행히 수요일이 만든 물약은 소녀와 수요일을 괴물이 되지 않도록 도왔다. 600년의 시간동안 수요일은 몸에 주기적으로 물약을 주입했다. 그 사이 소녀와는 헤어졌다. 그 사연은 조금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어쨌든 수요일이 또다시 괴물에 물린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약을 또다시 주입해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모두 괴물을 피해야 한다는 것. 600년이 지나고 다시금 괴물이 나타난 지금, 420일이 흐르는 동안 모든 것이 끊겼다. 전기, 통신, 음식 등 정부와 기업은 올스톱이 된 듯 보였다. 네 사람은 약을 가지고 시청과 정부부처를 찾아갔다. 이 약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계자도 만날 수 없었다. 만나주지 않거나 아니면 만날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이 매일 할 수 있는 일은 아파트 지하에 매립된 물 수조에서 물을 끌어올려 수요일이 모아둔 재료들로 물약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는 전방을 주시하고 음식을 구해오고 서재에 있는 책들을 아껴읽었다. 문제는 물약의 재료가 점점 떨어져 간다는 것. 지금 있는 약의 양으로 네 사람이 당분간 지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이 미지수였다. 괴물이 언제 몰려들지 또 언제 물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수요일의 선유도 아파트는 평생을 들여 번 돈으로 제작한 방공호 시설이 있었지만 여기서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박경은 그저 지금 짜파게티가 당길 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베란다에서 엄호를 하던 박경은 문으로 달려 나갔다. 케이트와 페니의 생사 여부를 아는 것이 1번, 2번은 짜파게티의 여부다. 그 까만 짜장맛이 박경은 너무 그립다. 아쉽게도 케이트와 페니는 오늘도 그 까맣고 맛난 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 하나를 들쳐 멘 상태였다. 박경은 하얀 방호복보다 그걸 들쳐 멘 페니의 모습에 더 놀랐다. 하얀 방호복 안에 구워 먹을 고기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비켜보실래요?"


페니는 참 참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원치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고 원치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불편한 감정을 늘 받아줬다. 허리가 쏙 들어가고 차르르 떨어지는 매우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좋아하지 않는데 우연히라도 그런 옷을 입으면 누구나 페니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웃지 못하는 것은 페니뿐이었다. 박경은 그런 페니를 보며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참  참하게 생겼고 늘 친절하다고. 420일 동은 극한의 이런 상황에서도, 족히 180cm는 넘을 것 같은 사람을 둘러업은 상태에서도, 비켜달라는 말을 저리도 친절하게 하는 것을 보면. 페니는 친절한 사람이다. 그러나 페니가 원하지 않으면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박경은 늘 하고 싶었다.


"뭐예요? 이건?"


물약을 만들던 수요일이 거실로 나왔다. 네 사람은 거실 바닥에 누운 하얀 방호복, 그 안의 사람을 일제히 내려다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위험한지 아닌지. 그 누구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은 420일이 되는 날. 박경은 여전히 짜파게티가 그립다.


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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