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의 원인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도영이는 정말 순둥이였거든요. 너무 잘 알고 있었죠. 아이를 돌보면 매일이 똑같았습니다. 잠깐 예쁘고 계속 힘든 상황이 반복되었죠. SNS를 보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며 삶의 활력이 넘쳐 보이는 친구들, 멋진 여행지를 맘껏 돌아 다닌 후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 세상은 부러움 천지였습니다. 잠깐이라도 숨통을 트자는 마음으로 열어본 SNS였습니다. 하지만 끌 때는 한 가지 생각을 했죠. 내일은 열어보지 말자고.
첫째에게는 둘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부모님 문제를 의논할 때에는. 살다가 부모님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두 자식이 이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부모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또 안정된 4인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아이 둘이 무난할 것이라 생각했지요. 무엇보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싫었습니다. 집에 있는 제가요. 얼른 나가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일을 시작했는데 둘째를 임신해서 그만 둬야 된다면 그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생동안 낳을 아이를 지금 연달아 낳아야겠다 생각했죠. 다시 일을 시작하면 열정적으로 내 일을 하며 살아가리라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결심이 굳어도 역시 임신은 ‘덜컥’입니다. 마음 먹자마자 둘째가 생겼습니다. 도영이 6개월 때였죠. 도영이도 엄마의 배가 불러오자 뭔가를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순하던 애가 배 쪽을 발로 차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어도 굳이 배불뚝이인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보채기 일쑤였습니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후회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도 절대로 들키면 안 됐습니다. 임신 호르몬 탓이지 내 생각이 아니다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출산을 앞둔 마지막 한 달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요. 정말 제 인생 통틀어 시간이 가장 더디게 가는 기간이었습니다.
한 이틀 지났나 싶었는데 하루도 채 지나가지 않았더라고요. 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나도 눈물 흘리며 우는 도영이를 달래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하다는 말을 까맣게 잊고 둘째를 출산했습니다.
둘째는 너무 달랐습니다. 조리원에서 아이를 면회할 때마다 유난히 크게 울어대는 아이. 도영이를 낳았을 때는 ‘설마 우리 아이가 우는 건 아니겠지?’ 걱정도 했었지요. 그렇지만 너무 순한 도영이를 키우면서 우리 아이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동생은 언니를 닮겠지요. 둘째 도은이를 출산했을 때에는 우리 아이 울음일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2일 된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조리원에서 건물이 떠나가라 매일매일 울어대던 아이는 저희 둘째 도은이가 맞았습니다......
도은이를 키우면서 저는 한없이 겸손해졌습니다.
‘아,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내가 도영이를 진짜 거저 키운 게 맞구나. 둘 다 내 배로 낳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아기가 우는 거야 그래, 아주 흔한 일이지만 적어도 시작과 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밤 새서 우는 것은 기본이었죠. 밤낮이 바뀌어서 운다고 하지만 좀 크면 그만 울어야 할 텐데 계속 밤낮을 모르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학교에서 수업하듯이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그날 밤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남편이 도영이를 데리고 시댁에 간 날이었습니다. 도은이를 낳고 처음으로 둘째와 단둘이 보내는 밤이었습니다.
‘낮에 우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아파트 사람들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다.’
한밤이 되어도 계속 울었습니다. 정말 허무한 것은 앉아서 안아도 보고, 일어서서 흔들어도 보고, 노래를 불러줘도 보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만가지 의성어, 의태어로 귀를 즐겁게 해주어도 보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우니까 말입니다.
TV를 통해 본 바로는 아무리 동네에서 좀 알려진 울보라고 해도 이상하거나 흥미로운 것이 보이면 잠깐은 멈추기 마련이었는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목소리는 왜 그렇게 큰지 울음 소리로 아파트를 날려버릴 것 같았죠. 너무 괴로웠습니다. 양쪽 귀 끝까지 귀마개를 밀어 넣은 그 시도가 무색하게 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했습니다.
이 정도면 아동폭력신고를 당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꼭 하루종일 맞아서, 못 견뎌 우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과 끝도 없이 울었어요. 하, 모성도 잠을 이기지는 못했나 봅니다. 까무러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극도의 소음이 있는 공사 현장의 노동자들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죠. 저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 새벽 2시였습니다. 계속 동일한 소리, 마치 녹음했다가 틀어놓은 소리처럼 일관성 있었죠. 그 소리로 맹렬히 울고 있었습니다. 도영이의 울음소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가냘픈 느낌이 있었는데 둘째의 울음소리는 악에 바친 앙칼친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 내리 12시간을 지치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저희가 도은이를 보고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울다가 다 컸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매 순간을 울면서 보낸, 자란 도은이였습니다. 가장 난감한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니 정말 아파서 우는 건지 아닌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픈 순간에도 알아채지 쉽지 않았죠. 그러니 멀쩡할 때에도 혹시나 열이 나서 우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해서 수도 없이 귀에다가 체온계를 갖다대곤 했습니다.
전신 두드러기에 시달렸습니다. 대학병원에 가서 알러지 종합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죠. 병원에서 약을 타다 먹으면 잠깐만 괜찮고 이내 올라왔습니다. 약을 먹으면 종일 몽롱해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기도 힘들었습니다. 밤에도 긁느라 제대로 잠들 수 없었고 살에다 아이스팩을 대고 새벽 5시에 겨우 잠드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렇게 출산 후 6개월까지 몸도 정신도 피폐하게 지냈어요.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출산은 2번이면 족하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많이 잃어버리는, 그런 인생 경험은 여태까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단순히 손목이 저리고 이가 시리고 아직 아랫배가 들어가지 않았고 젖병 씻는 게 귀찮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실존적 위기에 처하는 수준의 문제였죠. 제가 유약한 것일 수도 있겠죠. 차라리 저 혼자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힘든 줄 속속들이 알았다면 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