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수준 없는 한국영화 산업 3

조 기자의 연예수첩 14

by 조성준

예로부터 적당한 빈곤은 창의력을 키운다. 없는 자들을 달래고 현혹시키고자 지어낸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가지고 놀 게 없어 오감을 자극하는 흙장난으로 유년기를 보낸 쪽과 손댈 구석 없이 완벽한 고가의 장난감과 함께 자라난 쪽의 창의력 대결을 가정해 보자. 아마도 승자는 전자일 것이다.


물론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 최첨단 메커니즘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부잣집에서 태어난 천재, 구체적으론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 같은 부류는 현실에선 찾아보기 쉽기 않다.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굳이 예외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여러 예술 장르들 가운데 돈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기본기를 닦은 감독들이 주로 대성한다. 대부분의 재벌 2~3세들이 맨주먹으로 일어난 선대를 앞서지 못하는 이치와 비슷하다.

반면 넉넉하게 출발한 감독들일수록 한 번 망하고 난 뒤 저예산으로 돌아가야 제 실력을 발휘하곤 한다. 그렇다고 잘되기 위해 시작부터 일부러 망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의 한국 영화계는 쏟아지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맸다.

펀드로 대변되는 투자자들은 결과물, 정확히는 돈이 되는 성과물을 보기 원했고 그들로부터 투자를 받은 제작자들은 뭐라도 만들어내야 했다.


그 결과, 완성도 떨어지는 시나리오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황정민 등 출연진이 시나리오보다 재미있게 나왔다고 인정한 '베테랑' 정도를 제외하면, 관계자 시선에서 평가할 때 완성된 영화 대부분은 시나리오 단계보다 재미없다.


오래전부터 영화계에는 '좋은 시나리오로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모두 만들 수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로는 나쁜 영화 말곤 못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얘기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어 완벽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까닭이다.


나쁜 시나리오의 영화화가 늘어나면서 설상가상으로 기본기를 제대로 닦지 못한 감독 지망생들이 운 좋게 데뷔 기회를 잡았다. 제작 편수는 증가했는데, 정작 감독은 부족해서였다. 투자자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제작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인 감독들을 중용했다. 한 마디로 준비 안 된 감독들이 부실한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가 늘어난 것이다. 바로 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질적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은 양적 성장은 '모래 위의 성'이었다. 수익성이 악화되자 일부 금융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밤마다 고급 유흥주점을 전전하던 몇몇 제작자는 자취를 감췄다. 어렵게 이룬 산업화가 이대로 무너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국 영화계에는 마지막 보루인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외치던 영화인들이 역시나 재건을 주도했다.

국내에선 블록버스터를 매끈하게 만들어내는 상업영화감독으로,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선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쌍끌이 자리매김한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가 번갈아가며 영화팬들을 만족시켰고, 윤제균 감독과 김용화 감독은 우리만의 신파 감성을 더한 할리우드식 오락영화로 '신흥 강자'가 됐다.

여기에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과 '과속스캔들' '써니'의 강형철 감독이 가세한 가운데, 김윤석 하정우 등이 새로운 '흥행 보증수표'로 급부상하면서 자칫 허물어질 뻔했던 산업적 토대는 다시 다져졌다.


전례 없는 총체적 난국이지만, 지금의 위기도 언제나 그렇듯 우리 영화인들이 헤쳐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기발한 상상력과 정교한 아이디어로 앞장서고, 투자자와 제작자는 감독과 관객을 이어주는 가교로서의 뒷받침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특히 장사가 될 만한 영화에만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달려드는 얄팍한 상술은 이젠 버리고, '상품'과 '작품'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겠다.


위기란 단어에는 '기회'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관객들이 극장을 찾지 않거나 못하면서 돈이 마른 투자사와 영화사는 제작을 중단하고, 스태프와 연기자는 일감이 줄어들어 실업자로 전락하는 지금의 연쇄적인 위기 상황이 지금까지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회의 장을 제공할지 모른다.


현재로선 대책 없는 낙관론에 가깝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기회로 바꿔왔던 한국 영화계의 이전 모습을 떠올리면 코로나 19로 인한 이번 위기 역시 잘 이겨내리라 기대해본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박노해 시인의 시집 제목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빠진 한국 영화계 아니 우리 사회가 이제부터 반드시 걸어야 할 '노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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