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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준 Sep 16. 2020

극단적 선택은 아름다운 퇴장이 될 수 없다2

조 기자의 연예수첩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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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방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호주 록그룹 인엑서스의 보컬 마이클 허친스가 그랬고, 고층 건물에서 투신한 홍콩스타 장궈룽(장국영)이 그랬다.


2005년 이은주를 시작으로 올해 들어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유니와 정다빈도 이들과 비슷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기억하는 팬들의 숫자는 줄어들겠지만, 그리워하는 강도는 더욱 높아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연예인 누구에게도 자살은 결코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없다. 늙고 병들어 초라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다 하더라도 삶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인기 추락과 대중의 무관심 등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돌아온 연예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성기의 그들을 접할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을 얻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한낮에 머리 위로 쨍쨍 내려 비추는 햇볕이 아닌, 하늘을 은은하게 적시는 석양에서 오랜 마음의 울림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한국 연예계를 망령처럼 뒤덮고 있는 자살의 검은 그림자가 하루빨리 가셨으면 좋겠다.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될 수 없으며, 연예인 자신들에게도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아름다운 퇴장이 아니다.


위의 칼럼을 다시 읽고 나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자살'이란 단어를 왜 이렇게 많이 썼나 싶어서다. 

물론 이 칼럼을 썼던 12년 전은 어떤 표현이든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던 시절이긴 했다. 그럼에도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심지어는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상대가 우리나라 연예인이든 외국 연예인이든 절대로 쓰지 말아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글일수록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원칙을 망각했었다. 반성을 거듭하게 된다.


한편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한 명의 젊은 여자 연예인이 스스로 삶을 등졌다. 어느 정도 생사(生死)에 둔감해질 때도 됐지만,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으면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만큼 충격적이란 얘기다.


고인은 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의 파격적인 드레스로 처음 이름과 얼굴을 알렸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있었다'는 말처럼 개막식 다음날부터 엄청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명세는 유명세로 그쳤다.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내 대표작은 드레스"라며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처지를 솔직하고 재치 있게 전한 적이 있지만, 그로 인해 노출 연기가 뒤따르는 배역만 제안받아야 했다고 털어놨다.


드레스와 노출 연기는 아마도 족쇄처럼 고인을 옭맸을 것이다. 그 사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족쇄에서 벗어나 어중간한 인지도를 극복하고 고정된 이미지까지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도 저도 해 볼 수 없는 상황이 결국은 극단적 선택으로 자신을 내몰았을 텐데, 제대로 된 길을 가려하는지 마지막 한 번이라도 자문자답할 수 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잠시라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하며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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