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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솔 Jun 19. 2024

9화. 불장난의 정석, 그리고 연하남

식스팩남과의 진짜 말로, 그리고 뉴 보이

  태산과 화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태산과 또 싸웠다. 이번에는 정말 크게 싸워서 태산에게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전화번호 전부를 차단 당했다.     


  문제는 태산과 내가 또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다. 태산의 아파트 단지 커뮤니티 센터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난 뒤였다. 퇴사했지만 두 번의 대타 근무가 남아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 대타 근무 날이었다. 정오쯤 태산이 커뮤니티 센터의 헬스장을 이용하러 왔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려다가 태산의 얼굴을 보고 몸이 덜덜 떨렸다. 분노인 것 같았다. 내 근무 시간이 끝나고서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는 태산에게 다가가 화를 냈다. 태산은 이렇게 말했다.     


  “운동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라.”


  “내가 이따 연락할 테니까 가라고.”     


  나는 부들부들 떨며 퇴근했다. 40분쯤 뒤에 태산에게 카톡이 왔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했다.     


  “넌 애초에 네가 못 잊은 여자가 있으면 나한테 키스하지 말았어야 했고, 자는 건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해.”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너. 예의도 없고 너밖에 모르네.”   

  

  “잘 살아. 그럴 리 없겠지만.”     


  이번에는 먼저 태산을 차단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태산을 향한 저주의 말이어서 그랬을까? 한심한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어서 그랬을까?     


  태산과 정말 최악으로 끝을 냈어도 오래 태산이 보고 싶었다. 태산을 보고 싶어 하는 동안 나는 살이 많이 쪘다. 태산에 대한 후회, 나에 대한 혐오와 자학을 하는 만큼 쪘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도 단발로 잘랐다. 사람들에겐 주짓수 할 때 편하려고 잘랐다고 말했다. 근데 사실은 더 이상 남자 안 만나려고 잘랐다. 형교가 말했듯이 남자 대부분은 긴 생머리를 좋아할 테니 말이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주짓수 도장 출석에 더 열을 냈다. 운동하는 만큼 먹어서 살은 빠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주짓수는 실연에 꽤 도움이 됐다.     


  11월이었다. 그 무렵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깃값이 저렴했다. 연속된 사랑의 실패와 진로 계획의 정체로 괴로워하는 나를 걱정한 현정 언니가 즉흥적인 일본 여행을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울한 일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여행을 떠났다.     


  2박 3일의 후쿠오카 여행은 재충전에 성공적이었다. 여행 기념품으로 초콜릿과 젤리 같은 일본 간식을 작은 비닐에 담아 포장한 선물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 선물을 한창 열심히 다니던 주짓수 도장에 가져가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담이라는 주짓수 선수부 남자애와 말을 튼 것도 그때쯤이었다. 이담이 ‘잘 먹었습니다, 누나.’ 하며 디엠을 보내왔다.   


  이후로 이담과 많이 가까워졌다. 이담은 나의 1cm쯤 짧아진 앞머리, 1kg 정도의 감량 같은 사소한 변화를 알아차려 주었다. 몇 번은 집도 같이 갔다. 이런저런 의미 없는 대화들을 하면서. 한 달 정도를 그렇게 보내자, 태산은 잊히고 이담의 생각이 많이 났다.   


  하루는 이담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담이 제 자전거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날따라 따뜻했던 겨울바람이 나를 꼭 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느껴지게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이담이 “누나,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고 했다. 전에 내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한 말이었다. “그래, 연어 사줄게. 연어.” 이담에게 대답했다. 나를 집 앞에 내려준 이담이 말했다.  


  “누나, 내일도 스파링해요. 내일은 암바로 끝내드릴게요!”    


  웃으며 내일 보자,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는 이담과 스파링 할 수 없었다. 이담이 근력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짓수 수업이었지만, 이담은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체육관 구석에서 근육을 풀었다. 나는 그런 이담을 걱정하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담은 그날 집에 한 시간 먼저 돌아갔다.   


  요 며칠 계속 이담과 함께 집에 간 탓에, 이담이 없는 귀갓길이 쓸쓸했다. 집에 돌아가서 이담을 걱정하는 메시지를 잔뜩 보냈다. 이담이 ‘완전 감동이네요.’ 하며 볼을 붉힌 이모지로 답장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이담은 그날도 근육 부상 때문에 주짓수 도장에 나오지 못했다. 비가 오는 탓인지, 도장에는 사람이 없어서 이담과 메시지를 나눌 여유가 있었다.     


  “이담아, 지금은 부상 어때? 오늘 체육관 못 와?”

  “네, 못 갈 것 같아요. 지금도 아파요. ㅠㅠ”


  “그런데 누나, 오늘은 몇 시까지 운동하세요?”

  “9시.”     


  어떤 용기가 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담아, 나 데리러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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