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켄 로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
평생을 성실히 살아오며 노년에 다다른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 그러나 병든 아내의 간병과 본인의 심장병에 의한 퇴직은 그에게 모든 경제적 여유를 빼앗았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보조금이 없다면 길거리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그간 심장병으로 인해 나오던 건강수당 마저 끊어져버렸다. 파견 나온 비의료인 상담사가 질병수당을 거부해 버린 것이다. 그는 다시금 보조금을 받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컴퓨터를 사용해본 적조차 없는 그에게, 항소는 인터넷으로 해야만 한다는 어이없는 답변만이 돌아온다. 결국 다니엘은 쳇바퀴 돌 듯 제자리인 제도적 병폐 안에서 극도의 피로를 느낄 뿐,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지쳐가던 다니엘은 자신과 같이 행정의 폐단에 피해를 입고 있는 한 가정이 눈에 밟혔다.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싱글맘 케이티의 가족이다. 케이티 역시 생활고로 인해 보조금이 필요한 처지였으며, 아이 둘을 키우는 상황 속에서 돈이 없어 전기마저 신청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케이티의 가족은 보조금 지급 심사에 단 몇 분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보조금 지급은커녕 제재 대상이 되어버렸다. 늦어버린 몇 분과 상담원의 냉정한 태도는 그녀의 가정을 절벽 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손을 잡았다. 사회의 냉담함과, 상담원의 편협한 통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이상한 절차들은 다니엘을 분노하게 했고, 그런 만큼이나 케이티에 대한 연민은 커졌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의 유대는 공고해져 갔고, 케이티의 아이들은 다니엘 덕분에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삶의 고단함과 빈곤에 맞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했고, 케이티는 생리 대조차 훔쳐 써야만 했다. 극심한 굶주림에 식료품 구호를 받을 때 통조림을 정신없이 먹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생존권조차 탁상공론만으로 박탈하는 사회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의 후반에서, 다니엘은 행정기관의 벽면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며 스스로의 이름을 크게 쓴다.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제도의 무심한 폭력은 다니엘이 살아온 세상을 파괴하고 내려놓는 만드는 과정이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다니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다니엘은 스스로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써, 사회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자존하였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경제적 빈곤과 제도의 불합리뿐만 아니라 사회의 냉담함, 소통의 부재, 제도적 폭력이 어떻게 사람들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파괴하는지에 대해서 그린다. 이런 폭력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것은 거창하지 않은 서로 간의 작은 유대와 사랑으로 가능할 것이다. 다니엘과 케이트가 함께하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였듯, 거창하지 않을 지라도 몇몇의 조그마한 친절들이 우리가 힘든 현실을 살아가게 만든다. 영화가 환기해 준 것과 같이, 우리 사회도 유대를 통해 사회의 불편함이 해소될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