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나의몸상태로 부산까지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방법은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가는 방법이었다. 잠시만 의자에 앉아있어도 등허리 쪽과 엉덩이가 아파오고 저려와서 1시간 반은 도저히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1번 방법은 땡! 탈락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가는 방법이었다. 뒷좌석은 정자세로 누울 수 없는 길이여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야 한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이동하다 보면 허리통증이 오히려 악화될 것 같았다. 2번도 제외.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른 요통환자들은 어떻게 병원을 이동했는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사설구급차를 이용해서 전원 했다는 글을 발견했다. 구급차를 이용하면 똑바로 누워서 이동할 수 있기에 지금 내 상태에서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업체에 연락을 해보니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가능하고, 내가 이동할 거리만큼의 비용은 50만 원이라고 했다.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누워서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돈이 들어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설구급대원들이 약속한 시간에 내가 있는 병실로 왔다. 내가 누워있는 병원침대에서 들것으로 조금 굴러서 이동해 볼 수 있냐고 했다. 허리가 뻣뻣하고 옆으로 비트는 동작을 하자마자 통증이 확 밀려와서 못하겠다고 했다. 구급대원 여러 명이 하나, 둘, 셋 구호에 맞춰 내 몸을 조심조심 들어서 들것 위로 옮겨주었다. 들것에 누워있는 채로 구급차에 실려졌다. 구급차는 드디어 부산방향으로 출발했다.
사설구급차에 누워서 이동하면 편하게 갈 수 있을 거라고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탄 구급차 들것은 쿠션이 아주 얇아서 차가 이동할 때마다 노면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지턱을 쿵하고 넘거나 고속도로의 거칠거칠한 곳을 지날 때면 온통 내 허리로 충격을 다 받아내는 것 같았다. 또 들것 뼈대의 모양이 평평하지 않고 가운데로 움푹 파져서 왼쪽과 오른쪽이 약간 높았다. 그래서 바로 누워도 아프고 모로 누워도 힘들어서 몹시 불편했다. 고쳐지지 못해 큰 병원으로 실려간다는 불안감도 더해져 1분 1초도 참기 힘들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회개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동안 살면서 잘 못 했던 것 때문에 내가 이런 벌을 받는구나. 하나님 잘 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빨리 병원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는 마음뿐이었다.
구급차 운전해 주시는 분이 최선을 다해 시간을 단축해 주셨다. 생각보다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이제야 살았다 하는 마음에긴장이 풀렸다.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 침대에 눕혀진 채 대기를 했다.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누워있는 내 시야에 나타났다. 내가 걱정되어 병원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효녀노릇을 했던 내가 이렇게 서지도, 걷지도 못한 채 누워서 병원으로 실려온 모습을 보시고 엄마의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아빠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서계셨다. 나는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응급실 앞 길목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헷갈렸다. 자꾸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이제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들어가기 직전 체온을 쟀더니 38도가 넘는다고 했다. 자꾸 어지러웠던 게 열이 나서 그런 거였나 보다. 간호사는 내가 코로나일지도 모른다고 격리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갑작스레 격리실로 옮겨졌다. 격리실은 일반 병실이 아니고 음압병실이었다. 외부와의 공기가 차단된 특별한 공간이었다. 긴 면봉으로 코를 찔러 코로나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검사부터 받았다. 느닷없이 코로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잠잘 때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던 나였다. 코로나라고 판정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참 쉽게 흘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검사를 받은 지 30분이 지났을 무렵, 다행히 코로나가 아니라는 판정과 함께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방역복을 입고 나타난 의사 선생님께 지난날에 어떤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고, 지금 내 몸상태는 어떤 지 상세히 말씀드렸다. 최근에 찍었던 MRI CD도 건네어드렸다. 의사 선생님은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가셨다. 한참 뒤, 아까 만났던 의사 선생님과 함께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의사 선생님이 함께 나타나셨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 히스토리 전해 듣고 MRI도 확인해 보았습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아프시죠?"
"등허리 쪽 하고 엉치 부분이 아픕니다. 왼쪽 다리에 방사통도 있고요."
"MRI상으로 봤을 때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수술까지는 안 해도 되겠고요. 이전의 병원에서 입원 일주일하고, 누워만 있었던 기간이 합쳐서 두 달도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큰일 납니다! 큰 이상 없으니 두려워말고 움직이세요.걸으세요! 그래야 삽니다. 아프면 진통제를 먹으면서라도 걸어야 해요. 병원에 입원해서 재활해 봅시다."
2022년 9월 어느 날의 일이다.
교수님은 화를 내셨다. 아니 혼을 내셨다. 첫 만남에 대뜸 혼을 내는 의사에게 거부감이 들어야 정상이지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말속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하였나'하고 뜨악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자식뻘 되는 환자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그의 표정과 어투에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 혼냄이 타박이나 면박이 아니라 아버지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환자 데이터로 내려진 듯 확신에 찬 그 말이 불안했던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드디어통증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뒤죽박죽 엉킬 데로 엉켜버린 악순환의 뭉텅이를 조금씩 풀어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프니까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누워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아프지만 걸어야 한다고 하셨다. 진짜 내 몸에 큰 이상이 없다고? 그럼 이 극심한 통증은 허구란 말인가? 내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학병원까지 와서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또 들었으니,비록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있을지언정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재활. 지금까지의 내 삶에 없던 단어였지만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재활(再活)이라는 단어 뜻처럼 다시 살아나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잃었던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