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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16. 2023

가을날의 외출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 같은 기분으로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개미 한 마리 기어다니지 않는, 적적한 아파트 주차장. 고요한 공간에는 나의 콧노래도 울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속으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지만, 문득 슬픈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 옆에는 맞은편 아파트 단지에 속한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텅 빈 놀이터는 이상한 애수를 불러왔다. 활동적인 놀이를 싫어하는 나도 초등학교 시절엔 친구와 그네를 타며 놀았다.


 그럼 내 초등학교 시절 내 유년이 애수를 불러올 만큼 그리우냐, 그건 아니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인지할 수 없었던, 거울 속의 내가 나라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가끔 버거웠던 그 무지한 시절이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려면 내가 더 늙어야 한다. 지금은 충분히 늙지 않아서 어린 시절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어느 것은 추억이고, 어느 것은 추억이 아니고 뒤죽박죽이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말하지 않는 한마디로 그냥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도, 내가 더 늙으면 추억이 되는 걸까? 텅 빈 놀이터는 다행히도 미소할 수 있는 기억을 불러내고는 했다.


 하지만 나의 입가에 감도는 그 미소라는 것도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 내가 스물셋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스물두 살에도 그랬고 스물한 살에도 그랬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나의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언제쯤 나는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버린 이상 시간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여름이 지나서 가을이 다가왔다. 텅 빈 놀이터만이 아니라 주위의 온 세상이 가을을 입었다.


 소조한 세상. 소조한 내면.


 어쩔 수 없는 가을이었다. 나는 산책했다. 요즘 내 글마다 드리운 죽은 시인의 그림자를 이번 글에서는 걷어내고 싶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섬세하게 눈에 담으면서 걸었다. 그 죽은 시인은, 내가 한 번도 이름을 발설한 적은 없었다. 꿰뚫는 눈을 가진 독자들은 이미 당연히 그가 이 상(李箱)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아서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았다. 그림자 걷어내기의 목적을 기준으로 이 글을 판단한다면 아무래도 실패한 글이 됐다. 거의 백 년 전의 어느 삼월에 적적한 봄에 간수처럼 나무에 앉아 시인을 바라보았던 까마귀들이 이런 분위기를 자아냈을까 생각하며



간수들(?)



 부끄러운 실력의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너무 바보 같은 실력의 사진이라서 십수 번 고민했지만, 결국엔 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사진첩 속의 새들은, 멀리서 보면 정말 인간 세상을 감시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간수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의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도도한 얼굴일 줄 누가 안단 말인가. 아파트 꼭대기에 나란히 모여 앉아서는 가을의 소조함에 몸서리치는 인간들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물녘의 추위에도 까딱없이 자기들끼리의 한담을 나누겠지.


 그들은 나의 사진첩에 남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버려진 도토리 한 알도, 이미 태양이 누군가의 거대한 주머니 안에 들어간 뒤의 저녁 하늘도. 분홍빛과 보랏빛이 엉클린 절절한 하늘보다는 못하지만 연한 햇빛이 퍼진 저녁 여섯 시 경의 서쪽 하늘이 아름다웠다. 그 시간대에는 아름다운 것이 모두 서쪽에 있다. 글감 채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기준으로 나의 산책을 판단한다면 아무래도 실패한 산책이 됐다. 하지만 나는 알게 됐다. 저물녘의 서쪽 하늘은 절절한 그리움보다도 온순한 슬픔을 자아낸다는 것과 그 시간대에 서쪽을 배경으로 풍경을 찍으면 나뭇잎이 그림자처럼 검게 나온다는 것을.


 연한 햇빛이 퍼진 침몰의 서쪽을 향해 두 개의 부연 산봉우리를 향해 날쌔게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새라는 동물은 결코 잡을 수 없는 동물이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잡을 수 없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 정말 그것이 새라고 느껴진다는 것을. 어두운 길을 돌아갈 때 길 위에서 걸음마다 가로등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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