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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26. 2023

비 오는 날, 카페에서의 고독


 한 마리의 모기가 앵앵 소리도 없이 주위를 맴도는 것만을 제외하면 평화로운 실내에는 따뜻한 고독이 스며있다. 차양을 접으러 나간 여직원은 붉은 유니폼의 어깨를 빗물로 적시고 들어온다. 옆자리에서 기침하던 여자는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자객처럼 떠난다. 분명 무료한 수다쟁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 넓고 아늑한 카페 안에는 나 혼자뿐인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지. 목소리 큰 여학생의 말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고, 카운터 안쪽의 주방에서는 연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들은 전부 나와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오늘처럼 일도 없고, 약속도 없는 하루는 어딜 가나 관계없는 사람들 뿐이다. 옳지 비가 내린다. 나의 메마른 밑바닥을 적셔주겠다는 듯이 잘도 쏟아붓는다. 하지만 나는 구름의 사려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이다. 비를 뿌리는 구름은 심술 궂게 우중충해서 올려다보기도 싫고, 우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의 짊어지고 가는 행인의 굽은 등이 그 무거운 발걸음이 나의 기분마저 침잠시킨다. 비는 더 내린다. 자동차의 갑옷 속에서 운전자들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가던 길을 재촉할 뿐이다.

   

 우산을 나눠 쓰고 가는 두 명의 남학생을 본다. 친구는 다정해 보인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들이었는데 친한 사람들끼리 정답게 우산을 나눠 쓰고 가는 모습이 예쁘다. 우산을 나눠 쓸 사람이 없는 남자는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빗속을 걷는다. 남자는 허둥대지도 않고 우산 없는 빗길이 익숙한 사람처럼 느긋하게 멀어진다. 연극적이다. 남자의 표표한 자태는 움직이는 흑운과 같다. 남자의 마음에도 흑운이 잔뜩 드리웠나. 건너편 카페의 아늑한 실내에서 나른한 시선으로 짐작할 뿐인 나에게는 그의 마음이 들리지 않지만, 대도시의 부랑자 같은 그가 고독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야말로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고독한 사내여 굿바이.


 아까 붉은 유니폼의 어깨가 비로 푹 젖은 여직원이 다시 문 쪽으로 다가가자 신기하게도 비가 퍼붓는다. 비를 부르는 여자일까. 여직원은 갑자기 퍼붓는 빗줄기에 당황했는지 잠시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어둡고 위협적인 바깥을 주시하다가 이내 단념한 얼굴로 유리문을 닫아버린다. 그녀의 단호한 봉쇄로 인해 나는 카페에 갇혀버린다. 안전한 실내에서 함부로 벗어나는 건 안 되지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있다. 문이 안쪽으로 열린다. 교복 대신 사복을 입은 근심 없는 얼굴들이 출입문 근처에서 얼마간의 소음을 일으키는 것을 나는 불안한 가슴으로 지켜본다. 실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내면의 평화를 공격하는 것과도 같기에.


 실내의 천장 모서리에 부착된 스피커에서는 천연덕스러운 외국 노래가 흘러나오고 서서히 그들의 소음은 음악 속에 묻힌다. 내부가 다시 고요해진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동차의 갑옷 속의 운전자들만 겨우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빗길. 그들도 시야가 너무 뿌예서 애먹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은 비를 맞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폭우가 퍼부을 때 실외로 뛰쳐나가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직원이 굳게 닫은 유리문 너머로 거센 빗줄기에 매질당하는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거리로 나가기에는, 세상에 침입하기에는 아직 멀다는 것을 느낀다. 붉은 네온사인 간판이 다급하게 깜박이는 것을 나는 느긋하게 바라본다.


 조금 경박하게 깜박거리는 간판의 글자를 읽어보면 ‘노 방’이다. 노래방의 가운데 글자가 수명이 다해서, 남은 ‘노 방’만 경박하게 깜박거리고 있다. 저 경박한 곳에 기어들어가서 경박한 조명 아래서 아주 구슬픈 노래를 열창하고 싶다. 하지만 내 몸은 여기에 묶였기에 그것은 생각에 그친다. 붉고 푸른 조명 아래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동시에 아무나 들을 수도 있는 나의 적적함을 노래하다가 눈꺼풀을 감는 내 모습을 생각한다. 내가 허리를 살짝 젖히면 나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은 골반 근처에서 흔들린다. 빗줄기가 어느새 잦아든 아스팔트 길 위에 나뭇잎들이 조용히 뒹굴고 있다.


 그 나뭇잎들은 하나같이 크고 넓적한 모양이다. 몰아치는 빗속에서 그것들이 떨어지는 모습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친 새가 추락하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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