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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10. 2024

짧은 하루의 독백

 

 지난밤 유희의 흔적을 눈꺼풀에 새기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햇빛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의 의기소침을 배려하지 않고 맹렬히 내리 쫀다. 나는 선선한 바람이 통하는, 즐거운 상념의 냉장고와 같은 방에서 하루를 통째로 보낼 뻔했으나,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밖으로의 문을 열었다.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햇빛이 내 눈을 덮쳤다.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도 의지도 없는 나는, 나뭇잎 무늬가 그려진 양산을 펼쳤다. 품 같은 그늘이 눈과 피부를 태양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저 멀리 뜨거운 햇빛 속에서 걸음마다 소박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자그마한 할머니가 보였다. 그 할머니를 뜨겁고 맹렬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이것도 일종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 주의를 돌렸다. 벌을 받듯이 태양 아래 노출된 대낮의 거리, 인상을 찌푸린 어린 풀과 땀 흘리는 개미들. 나는 부드러움이라고는 모르는 현실을 언짢은 기분이 묻어나오는 걸음으로 조용히 가로질러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커다란 손그늘을 닮은 양산 그늘. 나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보호.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컨디션의 난조를 실감한 나는 지난밤의 무모함을 탓했다.


 지구 종말을 몇 시간 앞둔 세상에서, 절망과 혼란에 낭비될 수 있는 에너지를 절약하여, 침착하게 몸을 단장하고 헤어진 연인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다소 로맨틱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끄적거리며 새벽을 지새웠는데, 그 결과 엄청나게 늦잠을 자버렸다. 필름이 끊기는 바람에 소설 속에서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어딘가 나를 닮은 로맨틱한 주인공은 삶을 지속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이란 것이 오지 않는다면, 사랑을 갖고 도망친 연인의 아파트를 찾아갈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수 없다. 소설 밖에서 나는 새로운 태양을 맞이했고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주인공은. 내가 다시 질주의 욕망을 느끼기 전까지, 나의 불쌍한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연인의 아파트 앞에서 아련한 습도의 지나간 과거 따위나 회상하며 망설거려야 한다.


 그러나 아마 다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풋풋한 주인공은 영원히 지속되는 부드러운 밤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며 아름다운 추억의 불꽃을 응시할 것이다. 어쩌면 초췌하고 우울한 연인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보다, 혼자서 몽상과 추억의 미열을 앓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를 조금 닮았을 뿐 나와 다른 요소가 너무나 많은 그 희미한 피조물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희미하고 어두운 존재감. 내 안의 무수한 그림자들. 나는 새벽이란 시간의 안락과 열기를 갈구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이기에, 지난밤의 고요한 몰입을 버리지 못한 옛날 버릇 또는 실수라고 적는다. 오늘 수업이 있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나를 안락의 장소에서 강제로 끌어낸 유일한 목적인 도서 반납을 싱겁게 해치우고 도서관 일층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해보았다. 나는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담아서 쓰고 있는가? 내가 쓴 것을 정말 내 것이라고 느끼는가? 나를 담고 있는 소설은 에세이는 시 조각은 나 자신에 대한 진실된, 진실된 증언인가.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황홀할 정도로 나를 유혹하는 글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마지막 어루만짐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어딘가 시큰둥한 낯으로 어색해 한다. 그 시큰둥한 표정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마음을 찌른다. 쿡 하고 공격한다. 나는 내가 공개적으로 품고 갈 수 없다고 판단된 이십 몇 편의 글을 집행자의 손가락으로 지웠고,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지워버린 글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모두 나의 흔적이니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자아 실현의 욕구와 잘못 결부시킨, 애교 어린 실수의 모음들. 내가 어떻게 나의 노력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인정과 애정에 기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거울 속의 나에게도, 그리고 내 손끝에서 탄생하는 돌출성을 억누르고자 하는 고요를 사랑하는 성격의 문장들에서도 부족함을 보지만, 나는 늘 너그러움을 유지하고 포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꼴도 보기 싫다! 는 자학은 절대 금물이다. 나는 자학의 미학을 실행한, 이른바 자멸파 작가의 이름을 매일같이 발음하며, 그 발음을 진실에 근접한 마음으로 아낀다. 아끼는 마음에는, 그 사람을 닮고 싶지 않은 마음과 연민하는 마음이 얽힌다.


 연민이라. 연민이라. 나는 연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새벽빛 베일에 감싸인 나의 본질의 이름을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본질의 일부, 본질을 둥글게 둘러싼 수많은 본능 가운데 하나, 양자의 전자라고 생각을 정리해본다. 나에게 연민이란 이해의 욕구를 동반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을 조심스레 빛내줄 수 있는 문장, 어떠한 대상의 세계를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려나갈 수 있는 문장, 인간적인 따뜻함이 배어 있는 문장을 나는 쓰고 싶다. 나 자신을 어설프게 왜곡하는 문장이 아니라, 허울만 좋은 문장이 아니라. 지난밤의 소설은 끝맺지 못했지만, 그것을 되돌아보며 한 편의 글을 남길 수 있었다. 지지 않을 것 같던 대낮의 태양은 속절없이 지평선을 향해 떨어졌고, 피부가 사늘해졌다.


 바람은 사늘한 숨결 같겠지. 나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서운 두통을 비껴갔고, 집에 가서도 독서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다. 마음을 울리는 독서는 경이롭다. 내 안의 무수한 그림자들이 충족에 대한 갈증을 적시는 리듬, 오래 전부터 혈관을 타고 흐른 것 같은 애무의 리듬에 고요하게 열광하여 춤을 추는 순간의 경이로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에 내 안의 수많은 나는 분열 상태를 극복하고 하나가 된다. 내 안의 무수한 그림자는 충돌 상태에서 벗어나 함께 뜨겁게 어우러지다 그대로 촛불이 된다. 내 마음의 촛불이 켜진다. 그 촛불은 열정의 출발이다. 그 견고하고 묵묵한 타오름, 살아있음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 나를 쓰게 하며, 원하는 것을 내놓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쓰게 하는 힘이 되는 것만 같다. 마음을,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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