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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l 05. 2024

여름 감기

수필


 마음이 간질간질한 꿈을 꾸었다. 잠을 깨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간질거렸다.


 지루한 하루다. 나는 아프고, 날은 예쁘다. 요새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강아지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된통 걸렸다. 어젯밤에 같이 사는 가족이 약을 먹으라고 했는데 내가 말을 듣질 않았다. 가족의 말대로 약을 먹었으면 오늘 목이 아프지 않았을까. 아프다고 가족에게 어리광 섞인 전화를 거니 그러게 왜 어제 약을 먹지 않았냐는 나무람이 돌아왔다. 나는 웃어넘기며 오늘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7시까지는 도착할 예정이라고. 나는 7시까지는 자유이다. 이 다섯 시간 남짓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까 고민을 하다가 머리가 징징 울려서 침대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 고슬고슬한 얇은 덮개가 깔린 침대에 누워 이 글을 쓰고 있다. 너무 조용하다. 평소에 이맘때면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카페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시간인데.


 이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글을 쓰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위 문단에 등장한 가족은 나에게 어려서부터 조건 없는 애정을 수혈해준 고마운 사람인데, 예전엔 내가 쓰는 모든 글을 읽어주었다. 요즘은 글을 보여주는 일이 훨씬 뜸해졌다. 나의 글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었다는 걸, 그리고 지금은 잡히지 않는 요원한 것을 갈망하는 아름다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나의 엄마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변하지 않는 지지자이다. 변하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 눈에 나는 아직 철부지다. 그런 엄마도, 내가 가끔 눈을 반짝 빛내며 내 안에 있는 말들을 쏟아낼 때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놀라셨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엄마의 애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도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엄마처럼 사랑을 주며 키우고 싶다. 누군가 내게 아이를 낳고 싶어? 또는 가지고 싶어? 라고 묻는다면 나는 “꼭 그런 건 아니야.”라고 대답하겠지만 말이다. 정말 꼭 가지고 싶은 건 아니다. 육아는 너무 힘들 것 같다.


 어느 밤, 나는 모로 누워 잠든 지친 가족의 등 뒤에서 눈물길이 난 얼굴로 책을 읽었다. 아무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슬픔이 내면에 그득그득 차올랐다. 깊은 꿈을 꾸는 줄 알았던 가족이 뒤를 돌아보자 나는 당황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일상적인 목소리로 가족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의 작은 방으로 피신했다. 창문을 마주 보는 벽면에 걸린 고흐의 그림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그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며칠 후 인테리어에 애정이 많으신 엄마는 큰 방에 걸린 고흐 그림과 나의 좁은 방에 걸어 둔 그림을 서로 바꾸었다. 큰 방으로 이사한 그림은 꽃과 책이 그려진 그림이고, 내 방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저녁 일곱 시 경의 노을빛이 발갛게 고이는 바로 그 자리에 걸리게 된 그림은, <삼나무가 있는 밀밭>이었다.


 여름 감기를 앓는 나는 아까 그 그림 앞에 오도카니 서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퐁신한 구름이 흐르고, 푸른 혼처럼 타오르는 삼나무가 측면에 관조적으로 서 있는 그 그림의 밀밭 속으로 너와 함께 뛰어들고 싶었다. 깜짝 놀란 밀밭의 벌레들이 너와 나의 팔을 깨물겠지만, 짓궂은 질투라고 생각하자. 느껴지는가. 바람의 온도가 딱 적당하다. 너의 아픈 곳에 발라줄 약이 몇 번째 서랍에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돌아본 너의 얼굴에 가을 밀알이 묻었다. 밀알이 맛있어 보여서 너의 얼굴에서 떼어다가 입에 넣어보았다. 참 떫은 맛이 났다.

   

 여름 감기를 앓는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얌전히 침대에 엎드려서 글을 쓰고 있다. 약을 먹어도 졸립지 않다. 오전 열한 시쯤 집을 나간 가족이 돌아오기까지 세 시간 정도가 남았다. 애들 노는 소리가 들린다. 잠이 오지는 않으니 잠깐 쉬었다가 책을 읽을 것 같다. 멀리서 아련하게 공명해오는 아이들 소리를 계속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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