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솔매 Sep 09. 2024

심경


  왜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자신의 시선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다른 이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지만, 결국 문제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건, 어쩌면 조언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가볍게 경청해줄 시간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 어쩌면 사람은, 타인의 시간을 먹고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혼자 지내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 해도, 가끔은 타인의 시간을 섭취해야 하며, 거기서 제 존재의 온건함을 확인해야 한다.


  <미안하다> 나는 한마디를 전했고, 상대는 활짝 편 용기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접으면서 괜찮다고, 미안할 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부드럽고 오묘한 통증. 마치 흰색 새의 길고도 부드러운 깃털로 가슴을 간질이는 듯한, 장난스럽고도 무해한 통증. 나는 한숨을 내쉬거나 주먹을 움켜쥐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무척 무해한 고민이라는 걸 알고 있고, 어쩌면 이 고민이 나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상대는 괴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오만한 생각이다. 어쩌면 바람인 걸까. 허튼 생각은 그만두고, 상대에게 뒤척임 없는 잠과 행복한 식사와 가을의 다정함을 빈다. 그리고 내게도 똑같은 것들이 있기를 기도해본다.


  가족은 나를 이해하지 않고, 친구는 나를 시기하고, SNS의 타인은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쓴 뒤에, 마치 남이 쓴 문장을 보듯이, “이야” 하는 표정으로 보다 보니 입가에 슬쩍 웃음이 난다. 가면의 웃음이 아니라 가벼운 진짜 웃음이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어떨 때는 정말 그런 악귀 같은 생각이 치밀 때도 있지만, 투정에 불과한 문장이다. 글을 쓴다는 사람은, 자기가 쓰는 글이 곧 자기의 얼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악귀 같은 문장을 뱉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성격을 가진 글쟁이들에게 그런 성격을 가지지 않은 글쟁이들보다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 찰나의 방심에서 솟구친 악귀의 표정이, 진짜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 가령 이상(1910~1937)은 손도끼로 가족을 포함 인간이란 인간은 모조리 살육 어쩌고 하며 제 억눌린 심정을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토해낸 적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진짜 그의 얼굴이라고 하겠나. 아니다. 아니고 말고. 근거를 붙일 필요도 없다.


  그를 오래 본 독자는 헷갈리지 않는다. 그와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들도, 그리고 글 속에서 그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가족마저도 그의 인간에 대한 시린 충정과 그리움을 알고 있다. 순수한 그라는 걸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러나 우리나라 문학사에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희대의 불행아이자 희대의 행운아인, 한 요절 작가의 가슴속에 쓰러져 누워 있는 약한 짐승을, 조금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싶을 뿐이다. 내 안에도, 그것이, 행복에도 취약하고 불행에도 취약한 순진한 동물이 얌전히 몸을 말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여서 독자에게 맞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억눌린 마음에서 튀어나온 어리석은 헛소리를 독자가 진심으로 때리려 든다면, 작가라는 사람들은 기가 잔뜩 죽어서 자신의 지나간 인생과 도덕적 흠결을 진단하는 데 며칠을 허비할 것이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혼자서 슬퍼하는 종족이다. 나는 나중에 작가와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혼자서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가를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하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가 옆에 앉아주고 싶다.


  술에 취한 그는, 독자에게 존경을 받고, 독자와 사이가 좋은 작가가 부럽다는 진심을 미소 뒤에 숨긴 채 천천히 술을 따라주겠지. 머리 위로 노란 전등이 불빛을 던지고. 더 이상 나아가면 심경의 술회라는 애초의 목표에서 벗어나, 소설의 모양새를 갖출 것 같기에 이쯤에서 상상을 멈춘다. 아무튼, 전혀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나는 착함을 간직한 작가들을 참 좋아한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착함에서 오고, 그들의 헛소리도 착함에서 오고, 그들의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도 착함에서 온다. 예술가는 다 지옥에 간다는 드라마 대사의 유머에 소리내 웃지만, 나는 예술가의 선을 믿는다. 지옥에 가지 않는 예술가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동물을 사랑하고, 길가의 풀꽃을 함부로 짓밟아 죽이지 않는 것도 선이겠지만, 내가 감응하는 선은, 자신을 감추지 못하는 자의 정직성에서 우러나오는 선이다. 봉사자의 선보다 천치의 선, 종교인의 선보다 폐인의 선이다.


  선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선을 사랑하자. 나는 나에게 말한다. 나에게만 속삭이는 말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고 있는 고마운 사람의 고막은 나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다. 양해를 해주셔야 한다. 나처럼 소심한 편에 속하는 글쟁이는 독자에게 이렇게 해보자고 권유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기준에 맞게 잘 지내고 있는 분들에게, 아직 이론조차 잡히지 않은 나의 찰나적인 욕망을 속삭여? 싫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기를 원한다. 내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교정을 표연히 날아다니는 푸른 나비에 정신이 팔려 생각 따위는 전부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가을에도 푸른 나비가 있나. 푸른색은 쓸쓸함을 잘 견디나.


  모든 것은, 조용히 제자리로. 나는, 나의 글 참 좋다. 나는, 나의 삶 참 좋다. 왠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은 가을 저녁이다. 나는 결국 나의 문장으로부터 위안을 구한다. 오늘도 나의 문장을 받아내느라 고생한 흰 종이에게 고생했고, 채우니 더 예뻐졌다고 말하고 싶다. 다음엔 또 무엇을 쓸까.








배경사진: 서세옥 '사람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밤에 쓴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