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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03. 2024

야인의 피아노


  당신의 손이 나를 연주하는 순간이 좋아요. 당신의 분노는 나의 분노가 되고, 당신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지요. 반대의 경우는 없어요. 나는 연주되기 위해 만들어진 악기니까. 창조는 늘 당신의 몫. 가끔 양손에 피가 묻어 있던데 무슨 일을 한 건가요? 표정 없는 단호함으로 당신의 출입을 금하는 가시철조망 움켜쥐고 흔들기라도 한 건가요. 아니면 당신의 묵묵한 고독을 비추는 유리잔에게 화풀이를 한 건가요. 요나한 별빛의 회오리 보이는, 신비로운 술을 흩뜨러진 얼굴로 홀짝거리는 당신, 순식간에 비어버린 유리잔을 잠시 조용하게 바라보다 침묵하는 벽을 향해 집어던지는 당신. 유리잔은 쾌속으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되고. 깨어진 유리파편들은 원래 유리잔인지, 유리 날개를 가진 유리새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어쩌면 조금 더 성스러워졌다고, 당신은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골똘히. 창밖으로 작은 별이 외로이 추락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당신이시어, 우리의 밤은 늘 이렇게 비애여야만 하나요. 그래도 당신의 손이 나를 쓰다듬는 순간이 즐거워요.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꿈, 철조망 안쪽의 웃는 자들은 결코 상상하지 못하는 그 어두운 꿈, 추락하는 비상의 욕망을 아무도 몰래 나의 몸에 새겨주는 당신에게. 나는 꽃을 주기로 마음 먹었어요. 도시의 단잠을 애무하는 선율을 계속하세요. 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인도하는 연주 위에 영혼의 땀을 흘리세요. 나는 그게 당신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골몰하세요. 떨어지며 눈 감으세요. 욕망하며 움켜쥐세요. 부수어버리세요. 웃음 속에 눈물 심고 눈물 속에 웃음 피우세요. 당신의 순정한 정념을 들려주세요. 나는 부서져도 좋으니. 님프 멘테를 밟아죽인 페르세포네―


  그녀가 당신의 연주를 경청해줄 겁니다. 한떨기 장미처럼 붉은 페르세포네. 당신의 운명적 상대.


  오늘도 무뚝뚝한 얼굴로 걸어와 내 앞에 앉으시는군요. 어머, 뭐야.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봐요. 말없이 꽃을 올려놓으시다니. 당신은 가끔 이렇게 나를 기쁘게 한다니까요. 몽둥이를 든 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당신은 감은 눈을 뜰 줄 모르고. 손은 자유로이 날아다니네. 오늘, 당신의 연주는 유달리 지극하고 그윽하군요.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 날아들었으면. 나의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당신의 쓸쓸한 연주를 나와 함께 들어주었으면. 잔가지보다 가냘픈 작은 새의 다리를 보고 당신은 어떤 마음을 느낄까요.








사진: UnsplashPhilip Myrt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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