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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29. 2024

미류나무에 대한 추억


나는 그 시절 참 좋았다

아직 너의 몸에 피가 돌던 시절

피가 도는 아픔에 자다가도 불현듯 눈이 떠지던


먹지 못한 몸 두 개 겨우 구겨넣을 수 있는

너와 나의 그 아득한 옛방에서는

밤마다 촛불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너의 명처럼


무려 열여덟이라고, 살 만큼 살았다고 거드름 피우는 것으로

봄바람 스침에도 살갗 까지던 자존심을 위로했다

그 시절 나는 이상하리만치 자주 평정을 잃었고

죄인을 동경했는데 너는 그럴 수 있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 손목을 자주 비틀고 싶었는데

너의 촛불이 그리 빨리 꺼질 줄 알았으면 정말 한 번,

쥐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귀 먹은 달에게 말했다


행복한 사람은 더 행복하고 비참한 사람은 더 비참한

봄.

강물의 무감동한 흐름.

그래도 살아있던 시절.


너 울었던 밤 나는 그날 사람이 우는 걸 처음 보았는데

봄의 잘못이 나의 잘못 같았고

너 버린 애미애비 담벼락에 너 몰아넣고 야비한 짓 일삼던

패거리 때깔 좋은 얼굴 악몽처럼 떠다니던 학교


한편으로는 너의 무한한 잠재적 하늘을 동경한다는 패거리왕

그 말에 넘어가 미천한 웃음 짓던 너의 패배에

나는 선선히 주먹 힘을 풀고 무려 열여덟 타령이나 반복했고.


너 울었던 밤 그날 주인집 아주먼네가 내온 식은 밥상의

모든 무감동한 찬과 국 나를 혹하는 명계의 음식 같아

뱃속에 든 거지새끼 나 대신 앉혀놓고 거나하게 먹었는데

문득 고개를 드니 눈물만 뚜욱 뚜욱 흘리던 너였다


내가 너무 게걸스레 먹어서 그러나 싶어

숟가락 뚝 멈추어도 계속 비참해서 울던 너였다

나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어떤 고독한 성스러움을 느꼈다 미류나무 흔들리던 밤에

네가 애지중지하던 화첩은 헐값에 팔렸다

붓은 부러졌고 상다리만 서름하게 먹을 것을 받치고 있었다


슬픈 집의 슬픈 딸처럼 팔려간 화첩 내가 다시 찾아줄게

필요하면 돈을 두 배로 줘서라도 되찾아올게

붓의 절명은 비참의 연쇄를 끊는 한 개 의식이었다 생각하고

다시 하나 사다줄게


내 주머니도 네 뼛속처럼 비었지만

주머니가 비었다는 건 웃자고 한 소리고 방법이 다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울다 그친 사람은 쉬이 곤해진다는 걸 알게 된 밤에

나는 방 한구석에 치워진 밥상의 식은 찬이었으며

너를 닮은 봄바람에 휘어지는 미류나무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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