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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r 01. 2023

겨울의 초상

2023년 3월 1일


꽃은 피지 않았지만 겨울은 이미 떠난 것 같은 날씨다. 봄은 은근한 승리의 미소를 품고 겨울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봄은 항상 겨울을 이긴다. 겨울은 봄의 떠나가는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 없지만 봄은 늘 겨울을 내쫓는 입장이다. 그런 봄이 겨울은 미울만도 한데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 가장 고고한 계절이기에, 미련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는다. 자기를 쫓아내는 봄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씁쓸히 돌아서면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봄에게 언제나 밀려나는 자기의 신세를 연민할 줄도 모른다.


고고하고 차가운 겨울도 붙잡는 이가 있으면 조금더 늦게 떠나려나—생각하지만 그럴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 싶다. 다들 옷장에서 두꺼운 어두운색의 옷들을 치우고 밝은 봄옷을 그자리에 채워넣고 있을 것이다. 날이 언제 풀리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겨울의 떠남을 진정으로 아쉬워하는 사람이 아예 부재하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해도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별난 사람들에 속할 것이다. 나는 어떤 쪽인가. 어느 쪽에도 확실히 기울지는 않으나 나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가 되도록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문앞까지 와있는 봄의 입장을 기다리는 마음은 은근한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여행도 떠나기 전날이 제일 설레는 법이듯이 나도 봄을 맞기 직전인 요즘의 나날들이 제일 설레고 좋다. 확 체감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조금씩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서 내가 어둠과 싸워야하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어둠은 고요하고, 빈약한 생각을 풍부한 사색으로 바꿔주곤 하지만 혼자있는 날의 어둠은 내 편이 아닌 것만 같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저물녘의 아련한 연푸른색을 띠고있고 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서 글을 다 쓰고 집에 돌아가면 바깥은 더 어두워져있을 것이다.


학교가기 하루전. 여행을 떠나기 전날 저녁처럼 들뜬 기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일부터 내 일상이 새롭고 낯선 일들로 도배되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가오는 봄에는 희망이 있을까. 지금도 아주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더 길어지면, 내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이 나한테 선물처럼 다가올 것만 같다. 겨울이 봄으로 넘어가는 요즘의 나날이 되도록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지금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을 바라는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에 가장 근접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새순이 돋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옷차림만큼 가벼워진 아름다운 봄날은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줄까. 내 맘속 슬픔의 얼굴을 하고있는 권태 그것을 어루만져주는 손으로 나에게 모험의 길을 안내해줄까? 봄은. 만약 그런 것은 없고 새순만 푸르게 돋아난다면 나의 쓸쓸함은 겨울의 황막한 시간속의 쓸쓸함보다 더욱 짙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은, 오로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만이 할일의 전부인 요즘의 날들이 제일 포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고 있다. 겨울이 봄으로 넘어가야만, 겨울의 씁쓸한 뒷모습이 봄의 여유있는 시야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야만 나에게 새로운 일이 생길 것이란 걸. 그래서 애초에 막을 수도 없지만, 봄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소리없이 물러나는 겨울을 마음으로라도 붙잡지는 않으려 한다. 고고한 그는 떠났을 때처럼 고요한 발걸음으로 수개월 후에 다시 돌아와서 내 옷장을 겨울의 우수처럼 무거운 옷가지들로 가득 채울 것이다. 지금은 나도 가벼운 옷을 입고 싶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는 시점,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어른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쓴 아메리카노를 내 손으로 주문해서 마시기 시작한 이 시점에는.


내 앞에 바싹 다가와있는 봄에 내가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든 없든간에, 하나 확실한 건 지금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란 사실이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학교가기 하루전날 이렇게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은, 학교생활이 시작된 후에도 꾸준히 글쓰기를 소홀히 하지 말자는 다짐을 나 자신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시간이 없으면 꼭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글을 쓰자! 뭐라도 적어보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은 삶에서 글쓰기만큼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으니까. 글쓰기에 소홀한 자신을 나는 사랑할 수 없다.


밤이고, 혼자다. 


거뭇한 수염이 병든 잡초처럼 자라있고, 두 눈은 퀭하고, 온갖 고생으로 혹사당한 몸뚱이가 겨울가지처럼 말랐고, 말을 포기한 입술의 삭막함이 버려진 들판과 같은 어떤 남자의 처절한 전신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떠오른다. 온몸으로 고독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누더기 사내를 나는 무엇이라고 칭할 것이냐면, 그는 올해 나의 겨울이었다. 각자마다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겨울의 초상이 다를 것이다. 내가 가진 겨울의 초상은 이 사내—누더기같이 해진 사내다. 그 사내가 이제 떠나니까, 나도 누더기처럼 오래된 내 안의 고독을 내다버리고 좀더 향그런 마음으로 봄을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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