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난 건 약 2주 전부터였습니다. 잠잘 준비를 하고 있던 그날 밤 갑자기 어디선가 담배 냄새! 발원지는 화장실 환풍기였습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인 데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지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화장실 문을 닫고 환풍기를 틀어둔 뒤 일단 잠을 청했지요.
다음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 본 화장실은 마치 누군가 이곳에서 밤새 줄담배를 피우고 간 듯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급하게 화장실 벽면을 비누로 씻어 내리고 온 집의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보았지만, 맙소사.. 그 냄새는 퇴근 후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배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담배 냄새는 어김없이 찾아왔고요.
그랜트 우드, 센티멘털 발라드(Sentimental Ballad), 1940 / 목도리를 두른 채 담배 피우는 사내로 인해 중절모 쓴 남자가 괴로워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화가 났습니다. 함께 사는 공동주택인데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위층으로 냄새가 유입될 거라는 걸 모르는 걸까? 며칠을 참고 참다 관리실에 내려가 사정을 얘기해보았지만 '자신의 사유지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 환풍기를 새로 설치하면 조금 나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공고문도 안내방송도 안된다고 하는 말에는 그저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은 계약기간 동안 계속 이 문제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진 않은데.. 온 집에서 이젠 찌들어버린 듯한 담배 냄새에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누군지도 모를 그 흡연자가 미웠고, 길 가다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만 봐도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지요.
그랜트 우드, 혁명의 딸들(Daughters of Revolution), 1932
'화'라는 감정에 잠식되어 굳은 얼굴로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에 들었습니다. 다시 아침이 오면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담배 냄새를 맡으며 또야? 하는 찡그린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를 반복했고요. 평소 같으면 별일 아니라는 듯 그냥 넘길 법한 일에도 마음이 요동쳤으며 그 안에서는 자잘한 짜증의 파도들이 뜨겁게 넘실거렸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우아한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스스로 낯 뜨거울 정도로 시커멓고 발갛게 달구어져 있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를 이렇게나 쉽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이 나의 평온한 일상을 너무나도 간단히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지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 꽤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보는 시각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낳는걸까
이는 비단 최근의 담배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몇 달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의 사투와 긴 기다림은 저 자신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체를 지치게 만들었고, 자유에 대한 갈망은 꺾여진 희망과 분노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반복된 좌절은 미움과 증오를 학습하게 하는 것일까요? 작고 사소한 일에도 조금 참고 이해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지는 우리들의 요즘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요 며칠 우연히 바라본 거울 속 제 모습은 마치 그랜트 우드의 어떤 그림 속 인물들의 굳은 표정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참 깐깐하고 고집스럽게 생겼네, 하고 무심코 생각하다가 '결국 너도 그렇지 않니?' 하며 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듯한 작품 속 남자의 시선과 마주치자, 저는 몹시도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American Gothic), 1930
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그랜트 우드(Grant Wood, 1892-1942)의 대표작이자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되며 회자되는 작품인 <아메리칸 고딕>입니다.
작품 자체는 굉장히 간단하고 심플합니다. 화면을 꽉 채울 듯 정중앙에서 정면을 마주하는 두 남녀가 있습니다. 부부일까요 아니면 부녀지간일까요. 은근한 촌스러움과 고지식함이 잔뜩 느껴지는 겉모습에선 왠지 모르게 무뚝뚝하고 편협스러울 것 같은 성격이 엿보입니다. 건초용 갈퀴와 남자의 옷에 묻어 있는 진흙의 흔적은 그의 직업이 농부이리라 짐작하게 하고요.
이들 뒤편으로는 고딕풍의 뾰족하고 세모난 지붕이 있는 하얀 집이 보이는데 그 당시 미국에서 흔하게 지어졌던 코티지 양식입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싶지만 마치 삼지창을 들고 '내 집 앞마당에서 썩 꺼지지 못해!' 하는 듯 비장한 얼굴로 가로막고 있는 남자와, 이를 불안하게 곁눈질하는 여자에게 가로막혀 다가설 수 없을 듯하군요. 우악스럽기도 약간은 우스꽝스럽기도 한 이 작품은 어떤 배경에서 그려지게 된 것일까요?
(좌) 그랜트 우드의 자화상, 1932 / (우) 우드가 어린 시절 살았던 생가. 작품 속 집의 모습과 비슷한 양식의 외양이다.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평단은 미국 아이오와 출신의 그랜트 우드가 자신이 살았던 중서부의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를 비판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선뜻 느껴지는 편협스러움, 고지식하고 고집스러운 느낌은 이를 은근히 풍자하고 비웃는 것이라 받아들여졌죠. 때문에 그의 고향 아이오와 사람들의 거센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우드는 이에 대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여러 번 부인했지만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비판적 해석보다는 새롭게 이 작품을 보자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자신이 살았던 농촌 마을에 대한 사실적이면서도 따스한 시선이 담긴 작품이며, 농촌 마을의 보수적이지만 오히려 가장 미국적인 지역 가치에 대한 향수를 담은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우드는 이 작품 외에도 그의 고향과 같은 농촌 시골마을의 전경을 담은 소박한 화풍의 그림을 많이 그려냈습니다. 이를 소위 지역주의 또는 지방주의 미술이라고 하는데요. 지역주의란 급격하게 발전해가는 도시 및 기술적 진보와 그 당시 유럽 근대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추상적이고 모던한 흐름에 반대하면서, 지방사회의 견실한 농촌 가치를 주제로 삼는 미국의 미술운동을 말합니다.
우드와 같은 지역주의 미술가들은 미국 시골마을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특히나 그는 고향 아이오와의 풍경과 주민들을 담백하고 세밀하게 묘사했지요.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우드의 누이동생 낸(Nan Wood Graham)과 동네 치과의사 맥키비(Dr.Byron H. Mckeeby) / 어떤가요? 비슷한가요?
우드는 고딕풍의 첨탑이 달린 하얀 집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여동생 낸과 평소 알고 지내던 치과의사 맥키비 박사를 섭외해 하얀 집 앞에 서게 했지요. 이 둘은 부부가 아닐까? 했던 것과는 달리 화가 자신은 시골 농부와 그의 딸로 생각하고 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이 작품은 비판적인 초반의 평가와는 달리 세계 대공황 시기를 겪으며 후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의 얼굴과도 같은 작품' 수준으로까지 거론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목도 "American Gothic"으로 새롭게 명명되지요. 아직도 여전히 이 그림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분명한 건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관을 가진 회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과 그리고 가장 많은 패러디를 생산해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고딕> 패러디물. 찾아 보면 이 외에도 더 재미있는 패러디들이 많다. 마지막 그림은 폭설로 인한 암담한 심정이 느껴져 처량해보이기까지..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메리칸 고딕>의 패러디물을 보고 난 뒤 다시 원래의 작품을 보면, 처음 느꼈던 뾰로통한 얼굴들이 나름의 위트와 인간미를 가진 얼굴로 보이게 되는 마법 같은 재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머 한 방울이 가져다주는 한 끗 차이의 힘이 꽤 크지요?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가 사고와 생각의 차이를 낳는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미움은 우리의 특기가 아니잖아요
그랜트 우드의 그림 속 얼굴들과 그 패러디물을 보며 느낀 감정들, 그리고 매일같이 올라오는 담배 냄새와 함께 짜증스럽게 보냈던 몇 주간의 밤들을 되돌아보며 조금 심오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미움일까, 사랑일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 1931
사실 최근 일련의 밤들과 불편한 상황들을 겪으며 슬퍼졌던 이유 중 하나는 내 안의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슨 성인군자 같은 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에 온 마음을 다해 애쓰고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오른쪽 뺨을 맞았을 때 왼쪽 뺨을 돌려 내지는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똑같이 되갚고 싶진 않았고, 해가 지도록 화를 품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맞닥뜨린 부조리한 상황을 그저 해결하고 싶어 했고 분노하고 싶어 했으며,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여과 없이 일상생활에서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더 나아가 인간의 증명은 사랑이 아닌 미움이었던 걸까요?
지난밤에는 잠자리에 들며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유머 한 톨' 억지로 쥐어보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마음을 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특정 한 감정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내가 어떤 마음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분별하기가 힘들 때가 있지요. 아마도 지금의 나 자신이 그랬나 보다 다독여보았습니다. 사랑까진 안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품격까지 떨어트리는 생각과 행동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본 이미지 및 문구와 관련한 정치적 의도나 견해가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그들이 비열하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를 지키자)
-미셸 오바마
When They Go Low, We Go High. 미국의 미셸 오바마 전 영부인은 어느 선거 유세전에서 이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고 유권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비열하게 굴더라도, 우리를 비난하고 헐뜯어 깎아내릴지라도, 우리는 품위를 지키자. 인간다움을 잃지 말자.. 정치적 메시지를 제하고서라도 이 말이 주는 메아리는 충분히 묵직하고 의미심장합니다.
살면서 인간 본연의 사랑, 배려, 이타심 등과 같은 마음을 잃게 만드는 순간과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 않나요? 그 가운데 우리는 때때로 이기기도 하고 때때로 지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건 잘못된 것이라며 꼬집어줄 필요도 있겠고, 부조리한 것을 뜯어고쳐야 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황을, 상대방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무언가 시도해도 바뀌는 것이 없다면 조금 더 High한 시선과 태도로 품어보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참고 버티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그에게도 어떤 사정이 있겠지. 이번엔 내가 한 수 봐줬다~' 하며 유머감각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선에서 상황을 받아들여 보는 것 말입니다.
사랑하며 살기 참 힘든 시기입니다. 뉴스나 주위를 둘러보면 미워하고 적대시할 대상이 너무나 많은 작금입니다. 마스크 너머 표정을 알 수 없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기 어려운 오늘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과 마음 대신, 유머감각과 인간미가 탑재된 안경을 쓰고 한걸음 뒤에서 관망하는 1초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