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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Jul 11. 2020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나요?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 내게 단발병을 유발하는 그림


약도 없다는 '그 병'에 걸렸


사실 저에게는 오래된 지병이 있습니다. 햇수로 따지자면 한 6-7년 되었군요. 불치병은 아니고 난치병, 고질병 정도 되려나요. 이젠 익숙해져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거울을 볼 때마다 요 녀석의 존재를 새삼 깨닫게 되곤 합니다. 사실 이 병은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 가능하다고 하긴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도록 안고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아 물론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이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을 많이 보기도 하고요.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마주쳐도 우리는 압니다.


역시 당신도 그러하군요-!



하며 말이죠. 왠지 모를 동질감과 전우애마저 느끼게 하는 이 묘한 병의 이름은,


.

.

.


그림자만 봐도 단발이네요..


.. 바로 '단발병'입니다.


초록창 사전에서는 *단발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단발병

1.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연예인을 보고,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머리를 길게 기르지 못하고 계속 머리를 단발로 자르는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 신조어

2. 헤어스타일을 단발머리로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상태. 이 마음이 일정기간 이상 지속되어 그 정도가 심해지면 '단발'이라는 낱말 뒤에 '병'이라는 낱말을 붙여 '단발병'이라고 부른다. 원인은 다양하다. 오랫동안 헤어스타일의 변화가 없던 긴 머리 여성의 변신 욕구이기도 하고, 단발머리를 한 타인의 모습이나 사진을 보고 단발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또는 머리가 길어져 외모가 예뻐 보이지 않는 '거지존'에 도달하면 그 시기의 못생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짧게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다.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조금 짓궂은 고해성사였나요. 하지만 한번 걸리면 약도 없고, 완치되어도 재발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한 이 병은 사실 제게 꽤 오래된 고민거리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병이 발발한 6-7년 전부터 계속 단발을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죠.



엄살 쬐끔(?) 부려보자면 이 병으로 인한 일상 속 지장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과 사진을 찍어도 그 사진이 그 사진입니다. 같은 날 찍었다고 여겨도 무방하죠. 덥고 습한 여름엔 머리를 묶고 싶어도 늘 뒷머리 몇 가닥이 덜 묶여 목덜미에 미역처럼 붙어있는 건 일쑤구요. 가끔 청순한 머리 스타일을 보고 따라 해보고 싶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꾹 참고 길러보지만 어느새 소위 말하는 '거지존(머리 길이 정체 구간)'에 딱 걸려, 다시 단발로 댕강- 잘라버리게 되고 말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단발병의 무한 루프랄까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걸까. 저의 단발병의 역사를 되짚어보다 보니 한 그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이라는 그림입니다.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헬레네 클림트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 1898

한 소녀가 있습니다. 정면이 아닌 옆모습을 담았군요.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지금 어디를,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걸까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 듯 살짝 긴장한 그 수줍은 모습이 참 사랑스럽습니다. 쑥스러움에 볼 위로 발그레 피어나는 홍조는 마치 더운 여름의 살구 빛깔을 떠오르게 하구요. 아이보리색과 회백색이 섞인 크림빛이 그림을 뒤덮고 있어서 어디부터 벽지이고 어디부터 드레스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 오직 선명한 것은 얼굴을 가릴 듯 말 듯, 소녀의 턱선을 따라 정확하게 끊어지는 밤색 똑단발입니다.


이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의 딸, 그러니까 클림트에겐 조카인 '헬레네 루이즈 클림트'를 그린 작품입니다. 헬레네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헬레네가 태어난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에른스트 클림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이에 이미 아비를 잃은 헬레네가 클림트는 마냥 가여웠나 봅니다. 함께 미술 작업을 하며 진한 우애를 나누었던 아우에 대한 애도와 어린 헬레네에 대한 연민으로, 클림트는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 열과 성을 다해 보살핍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헬레네의 어머니였던 헬레네 플뢰게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클림트의 플라토닉 러브의 상대였던 에밀리 플뢰게였습니다.


(좌)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  /  (우)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1902

아시다시피 호색한이었던 클림트는 살아생전 많은 여인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염문을 낳았는데요. 때문에 그의 사후에 '이 아이의 아버지가 클림트'라고 주장하는 10명 이상의 여인들이 등장하기까지 하죠. 그렇게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클림트이지만 유일하게 에밀리 플뢰게에 대해서만큼은 영혼의 사랑을 고백하며 순수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플뢰게 역시 클림트 사후 그를 둘러싼 온갖 재산 및 양육권 분쟁을 묵묵히 해결해주며 끝까지 클림트를 지키고 보호해주죠. 


이 둘의 관계는 애틋하고 열정이 들끓는 연인 같다기보다는 예술적 여행의 '동반자'에 가깝습니다. 이는 클림트가 플뢰게를 그린 그림만 봐도 알 수 있죠. 관능적인 시선으로 그림 속 모델을 바라보며 다소 에로틱하게 그려냈던 그의 주요작들과는 달리,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속 그녀는 우아함 그리고 도도함 그 자체입니다. 모델 주위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빛 선들도 보이지 않죠. 차분한 톤의 배경 가운데, 나중에 의상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쳤던 그녀를 상징하는 듯한 기품 있고 트렌디한 드레스를 입은 에밀리가 지긋이 화면 너머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난 당신을 이해해요, 구스타프 클림트."


(좌) 캄머 성 공원의 잔잔한 호수, 1899  /  (우) 아터 호수의 캄머 성, 1908-1909

실제로 그녀는 클림트의 여성 편력을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주었으며, 그의 작업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클림트가 해마다 여름휴가로 찾던 아터 호수로 늘 함께 떠나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기도 했죠.





화려함 대신 소박함, 한 끗 차이에 숨겨진 내공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러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우리의 헬레네 클림트는 부족함 없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작품 속 헬레네가 몇 살 정도 되어 보이나요? 저는 처음 오늘의 이 그림을 봤을 때 중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예상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가 6살 꼬꼬마일 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클림트가 조카 헬레네를 성숙하게 그려내면서도 결코 성적인 대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좌) 유디트, 1901  /  (우) 다나에, 1907-1908


우리가 아는 클림트의 작품 속 여성들을 떠올려 봅시다. 앞서 얘기했듯이 관능적인 시선으로 그녀들을 그려내고 있죠? 성경 속 성녀였던 유디트는 반쯤 감긴 눈과 살짝 벌어진 입이 강조된 나른한 이미지로 표현되었고,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의 모습에는 사랑의 기쁨과 환희가 가득합니다.


클림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고혹적이게 그리고 위험하게 그려낸 화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 뿜어져 나오는 금색 빛의 향연에 훅- 이끌리면서도 과감하고 감각적인 형과 선에 당황하기도 하죠. 이렇듯 클림트는 여성을 에로틱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신화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여성의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 표지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은 소탈하다 못해 소박하고 평범하게 느껴집니다. 화려한 색감이나 장식적인 요소들은 한꺼풀 걷어내고 오로지 한 인물에 집중합니다. 구성이나 채색도 극도로 단순화하여 담백함과 여백의 미도 느껴지구요.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헬레네의 단발머리에 주목하게 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조카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지요. 지금 막 손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질 만큼 질감처리가 뛰어납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들여다보세요. 어린 숙녀에 대한 화가의 애정이 은은하게 묻어나지 않나요?


개인적으로는 클림트의 예술적 위대함이 이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정신 못 차리게 휘황찬란한 표현과 기교를 다 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거장의 아우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황금빛의 색감과 장식적인 요소들을 다 제하고도 클림트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이전의 작품들처럼 즉각적으로 눈이 즐겁지는 않지만, 앳된 소녀의 옆모습을 통해 묵직하고 진득한 고요함 속에 빠지게 되죠. 평화롭고 잔잔한 여운이 있는 이 그림은, 그래서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다시 볼 때 감동이 더 극대화됩니다. 매일 피자, 파스타와 같은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가, 우연히 어느 골목길에 발견한 허름한 가게에서 맑은 국물 맛이 일품인 곰국 한 숟갈을 떠먹는 기분이랄까요? 클림트의 삶 한 쪽 귀퉁이에서 마주한 이 그림은 이와 같은 이유로 제게 '단발병을 유발하는 그림' 이상의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당신만의 트레이드 마크


단발이 잘 어울리는 수많은 연예인들의 단발컷 사진 보다도 저를 끊임없이 유혹에 빠트린 이 그림, 결국 단발병의 수렁에 빠져 아직까지도 단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 이 그림..! 혹여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단발병에 '전염'(?)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음.. 사실 나쁘지는 않아요. 단발이 주는 매력과 이로움도 충분히 있거니와, 이제 단발은 제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거든요.


그때도 여름이었네요. 처음 강의에 나가던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덥고 길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이라는 의미가 주는 심적 요인이 있었겠지요. 그 해도 어김없이 단발병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이걸 계속 길러 말어 망설이곤 했던 저. 강사치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나인데 단발머리는 그런 이미지를 더 부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거든요. 함께 출강 나가는 선배들과 모여 스터디를 하던 어느 날, 한 선배의 한마디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자기는 단발머리를 본인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면 되겠다!



아니 선배, 저 단발 싫다구요. 단발머리 때문에 절 너무 어리게 보면 어떡해요? 안그래도 처음이라 서툴고 어설픈데 그런 모습을 더 강조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하며 완강히(?) 거부하던 저에게 그 선배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일단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 보이진 않는다(..이게 제일 컸네요, 사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이나 깊이는 겉모습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너의 이미지를 더 돋보이고 각인시킬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를 네게 꽤 잘 어울리는 그 단발로 삼으라고요.


그리하여 그때부터 제 트레이드 마크는 단발이 되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전부터 이미 '단발' 하면 제가 떠오를 정도로 주변 지인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이미지가 되어 있었더군요. 트레이드 마크는 스스로 정하기도 하지만, 때론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나 봅니다.


여러분은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으신가요?


트레이드 마크란 그 사람의 고유한, 그 사람 하면 딱! 생각 나는 대표적인 모습이지요. 우리가 클림트 하면 '황금색' 하고 떠올리는 것처럼요. '난 이게 트레이드 마크야' 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어요. 사실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색이 잘 어울리지? 나의 이미지와 들어맞는 향은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 본연의 성격이나 특성이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 말투나 습관은 어떤 걸까? 어쩌면 이 질문들은 '나를 구성하고 의미 있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가장 나의 색과 결을 잘 드러내는 부분은 무엇인가' 하며 자신을 사색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어렵다면 주변에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객관적인 제 3의 시선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코로나로 인해 집 안에 머물러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는 올해입니다. 특히나 이제 막 시작되는 장마로 인해 집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 같아요. 그럴 때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을 곁에 두고선 자신만의 색과 결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자신을 잘 표현하고 드러내어 주는 것 역시 자기 존중의 한 방법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글. 아트소믈리에 지니



p.s.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가 해마다 여름휴가를 위해 찾았던 아터 호수로 떠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글을 읽어보세요. 인물화와는 달리 전원적이고 관조적이기까지 한 색다른 클림트의 풍경화를 만나보실 수 있답니다.


https://brunch.co.kr/@white-jinny/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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