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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Jan 02. 2020

공부와 언어, 그리고 퇴행

몇 년 전 오랫동안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던 분으로부터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분들이 책으로 내려고 할 때 한국어 글쓰기가 점점 나빠지는 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일하는 저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장의 깊이는 그 언어를 두고 강의를 하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그렇게 외부의 세계와 부딪치면서 가다듬으며 확보되는 것인데, 한국의 여러 대학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경우에도 영어로 강의를 하게 하고 영어 논문을 쓰기를 적극적으로 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는 곳도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내 연구결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내용이 한국사회에서 한국어로 공유되고 사용되지 않을 때인 것이지요.


공부가 점점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어떤 꿈이 있어 수능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를 묻기보다는 만점이라는 결과에 집착을 하고, 어떤 고민을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묻기보다는 인용지수가 몇 인 저널에 논문을 냈는지를 따집니다. 물론 어려운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것도,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낸 것도 바람직하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문제는 많은 경우 거기까지만 궁금해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일차적 수준의 껍데기만 남은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공부가 점점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의 깊이와 넓이에 어느 정도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창조과학부의 SCI 논문 분석을 보면 1995년 한국의 논문수는 5,878편이었는데 2017년은 6만편입니다. 1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물론 이 중 다수는 과학/기술 분야 논문이겠지만, 한국사회를 다루는 논문 숫자 역시 급증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그 기간 동안 더 나아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10여년 기간 동안 한국사회에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 여러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대학 외부에서 나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분들이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대학의 교수들보다 공부할 시간이 많거나 자원이 더 많았을리 없습니다. 다만, 보다 자신과 한국사회에 더 절박한 질문을 두고 씨름하듯 공부해서 글을 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도현 선생님의 <장애학의 도전>도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긴 서평을 썼던 이유는 진지한 학술교양서에 가까운 이 책에 대중들이 다가갈 수 있는 제 나름대로의 가이드북 같은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서평은 아래 링크로 공유하겠습니다.) 자신의 현장을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뭉툭한 언어를 벼려내고 견고한 장벽에 균열을 내는 학자들을 만나면 함께 응원하고 칭찬하고 비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현장을 지키며 언어를 넓고 깊게 만드는 사람들을 한국사회가 조금 더 아끼고 지원했으면 합니다


 https://beminor.com/detail.php?number=14204&thread=03r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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