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년 전 노동현장 활동을 준비하던 어느 학생회실이었을 게다. 묵은 때 가득한 소파에 앉은 앉아 추혜인과 이야기를 나눴었다. 첫 만남에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던 그녀에게 남성인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몰라 함께 있으면 말을 과도하게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추혜인은 그런 말을 들으면 삶의 보람을 느낀다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참 좋았었다. 『왕진가방 속의 페미니즘』에는 당시 의대생이던 그녀가 마을 의사가 되어 삶의 구석구석마다 쌓아온 이야기가 담겨있다. 의사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에 계속해서 질문하고 환자마다 다른 삶의 고유한 이야기에 공명하며,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고 만들어낸 시간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오래 살고 싶어진다. 할머니가 된 추혜인은 얼마나 더 멋질까.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871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