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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섭 Dec 24. 2021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中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지난 몇년 간 읽었던 우화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p169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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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하나 있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모여 모여, 흘러 흘러 마지막으로 바다로 흘러들지. 그러나 이 물이 하는 숱한 여행 중에서 언젠가 한 번은 사막을 건너가는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흐르다 마침내 사막 앞에 다다른 물은 절망하지. 달구어진 거대한 모래사막을 앞에 두고서 물은 공포에 떨어. 물이 사막을 건널 수는 없으니까. 도중에 물은 깊은 모래 속으로 빨려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니까. 


그 때 사막이 물에게 말하지. 선택하라,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물은 물론 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자 사막은 그러면 고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라고 말해. 


하지만 물이라는 육체의 아이덴티티 밖에 알지 못하는 물에게는 그 물 (육체) 형태를 잃은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야. 그래서 물은 더욱 공포스러워하지. 


그 때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우리와 함께 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거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육체)이라는 형태를 생명으로 알았던 물은 자기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순간은 오고, 그리하여 그 물 중의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그 때 공기로 변하는 쪽을 선택했던 물은 비로소 그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래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죽음을 맞이했던 다른 부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떨어져 나가야 했던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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