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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Aug 15. 2021

모두의 겨울 그리고 봄: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성냥팔이 소녀

 "그땐 누나와 할머니를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편안히 보내주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말이죠."


 성냥팔이 소녀. 그는 동화집 재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한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혼자 자라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고. 성냥팔이 소녀를 쓰며, 슬픔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서야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오는 법'을 익힌 것만 같다고. 동화작가는 동화 속 소녀 즉, 누나와 헤어져 살아야만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였다.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었던 할머니, 누나와의 이별을 차례대로 받아들여야만 했지만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을 작품의 세계로 이끌어준 한 소설가를 만났다. 그 소설가는 안데르센의 슬픔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매일 울기만 하다가 겨우 그 눈물을 그쳤을 때 즈음이었습니다. 그때 소설가 캐스퍼를 만났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역시 제 나이 때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는 봉사활동을 하러 온 첫날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안에 있는 슬픔을 글로 써보렴. 하고 싶은 말이라면 무엇이든 좋단다. 그때 그 말 덕분에 누나와 할머니를 비로소 보내줄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누나의 죽음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에서였다. 날이 따뜻해지면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기 마련이니까. 그는 겨울부터 각종 씨앗을 그러 모아다 햇빛이 잘 드는 공터에 심곤 했다. 매일매일 땅 속에 잠든 꽃씨를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으면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라고 언젠가 할머니가 해준 말 때문이었다. '아직은 춥지만, 이 추위도 봄이 오고 있는 증거라고 했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기 마련이니까. 곧 꽃이 필 거고, 그럼 다시 누나를 만날 수 있어. 그때 내가 피운 꽃을 보여줄 거야. 그리고 내가 쓴 글도 보여줘야지.'


 그가 맨 처음으로 쓴 글은 자전적 내용을 더한 동화였다. 캐스퍼와의 만남 후 그는 조금씩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옮기곤 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자신보다 더 어린 소년이었다. 잠시 가족들과 헤어진 소년은  매일을 눈물로 지새우다가 정원사인 이웃집 아저씨와 가까워지며 그곳의 꽃과 나무를 함께 돌보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 나뭇가지를 타고 동네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다니다 헤어진 가족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나무는 끝도 없이 자라 소년의 길이 돼주었다. 팔을 나란히 펴고 바람을 맞으며, 개울가를 지나고 산을 넘어 다녔다. 조금도 무섭진 않았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은 무엇보다 튼튼한 땅 위였으니까. 또한 그 나무를 아저씨가 정성 들여 보살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밤이 되면 별을 누며 누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나무는 더 자라 있었다. 소년에게 그 길은 행복의 세계로 가는 길이었다.


 쓰고 지우고를 몇 번씩 반복하곤 했다. 캐스퍼 역시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새싹들이 봄보다 더 먼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봄이 오고 있어.' 그러나 불행한 소식 또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꽃과 나무가, 나비와 벌이 봄의 아름다움을 더할 때 그는 더 이상 누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누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겨울을 씩씩이 보냈지만, 누나는 그러지 못한 듯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누나가 그렇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그해 겨울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만을, 추위가 그를 집어삼켰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됐을 텐데, 그는 또다시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그 고통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마음에 각인되었다. 캐스퍼는 그런 그에게 또다시 온기를 건넨 사람이었다. "누나의 추위를 안데르센이 녹여주는 건 어떨까. 작은 성냥 하나로도 온기를 더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저는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영영 떠나버린 누나에게 영원한 따스함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처음엔 난로와 같은 온기 그 자체였고, 다음엔 배고픔에 지쳤을 그를 위한 풍성한 저녁 식사였고, 마지막엔 영원한 안식처였어요. 누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세 가지였죠. 그녀가 누리지 못한 것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픔이 없는 안식처를 선물해주고 싶었죠. 그게 할머니의 품일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녀는 정말로 행복했을 거랍니다. 그리고 저도 그때서야 조금씩 마음을 놓았던 거 같아요."


 "성냥팔이 소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 어떤 동화에선 크리스마스이브고, 어떤 동화에선 한 해의 마지막 날이더군요. 이것도 큰 의미가 있을까요."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한 건 작품을 발표할 때 즈음이었어요. 동화를 쓸 땐 우리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다시 작품을 꺼내 봤을 땐 모두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추운 겨울, 어디선가 작은 소녀들은 여전히 살기 위해 추위와 싸우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여기는 날들인 크리스마스와 한 해의 마지막 같은 날들에도, 우리가 축배를 드는 그 순간에도 어떤 이들은 길에서 온 몸으로 추위와 맞서 싸워야 할 테니까요. 소녀가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라고 외칠 때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성냥을 사주길 바라는 마음. 그래서 소녀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 전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길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추위를 녹이는 것이 난로뿐만이 아님을 그곳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고, 어린 소녀들의 안녕을 빌어주며 온기를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온기를 품고 집에 돌아가 자신들의 온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것이다. 이 겨울의 추위가 다 사그라지고, 모두에게 봄이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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