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아줄

엄마가 돌아왔다 1

스물한 번째 날(6/10)

by 하얀


P1120717.JPG 안개에 가려 범섬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보슬보슬 정도로만 내리던 비.


헤헤. 사실 떠났던 게 아니었으므로 돌아온 것이 아니지만, 마음만은 '상봉' 느낌이었다(사실 떠나온 것은 나다). 나는 꽤 지쳐있었고(못 자서), 벌레와 늦은 새벽에도 자꾸만 켜지는 센서등에 쫄아있었다(밤만 되면 무서움).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을 처치하고, 그냥 엄마가 좀 보고 싶었다. 그것은 엄마가 내 엄마이기 때문인데(이것은 무슨 말장난인가). 엄마가 오길 기다리며 생각해보니,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상기돼 뭔지 모를 감정들이 더 커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날 만나러 오는 엄마의 비행기표를 끊어줘 본 적이 없었다.


제주에 살 때 최소 2번 이상은 날 찾았을 엄마. 좋다고 소문난 관광지를 찾아가지도 못했다. 그저 짬을 내 배웅하며 공항 근처 바닷가 따위를 찾았을 뿐이었다. 당시 난 휴가는 낼 수 없었고, 쉬는 날도 없는 상태였다. 엄마가 그런 날 찾은 건 첫 번째 집을 계약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혹은 이사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잘 살고 있나 또는 잘 살아라, 란 말을 '온몸'으로 건네기 위해 제주가 아닌 나를 찾은 것이었다.


엄마한텐 늘 잘하고 싶었다.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엄마가 처음 수술을 할 때였을까. 사실 지금 생각하면 큰 수술은 아니었는데(그런데 가족 입장에서 별 거 아닌 수술이 있을까 싶다), 친구한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 나 엄마 없으면 못 산다" 엄마 없으면 못 산다고 해놓고 엄마 곁을 먼저 떠난 건 나였었구나. 그런 걸 나는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돌아왔다. 유월십일. 장마와 함께. 먹구름과 안개보다 반의 반 박자 먼저.


엄마, 나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엄마를 기다린 적은 얼마나 될까(사실 적진 않다. 엄마는 시간 약속에 자유로운 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까지 모두 합친다면 엄마와 비교가 안 되겠지. 그중에서도 내가 태어나길 가장 초조해하며 기다렸을 엄마. 요새는 자꾸 그런 상상이 된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던 엄마가 엄마가 되는 모습이. 사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주로 혼자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내 유년시절의 시선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뒤를 항상 잘 따라갔던 거 같다. 어디로 새지 않고. 우리의 목적지는 주로 병원이거나 어린이집 정도였던 거 같다. 그러니까 그때도 사실상 날 위한 목적지를 함께 가고 있었던 거였다.


당일치기를 제외하면 엄마와 이렇게 단둘이 여행을 다닌 게 처음인 거 같다. 올해 환갑을 맞이한 엄마. 십여 년 전부터 환갑 땐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엄마. 코로나19 사태로 예약했던 여행표를 취소하고 실망해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표정을 떠올리며 기다렸다. 기대와 설렘을 가득 안고. 문이 열리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와야 할 버스는 오지 않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 했던 고기국수집은 문이 닫혀있었다. 그렇다. 여행은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첫날 근처 어딘가라도 들러보려고 했던 계획은 숙소 앞 바다를 감싼 안개를 보고,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늦어버린 시간 때문이기도 했다. 짐을 풀고, 숙소 앞 바다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사진을 몇 방 찍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전날 잠을 설친 것은 물론, 그럼에도 일찍 일어나 밑반찬을 열심히 만들었던 엄마는 제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지쳐있었다. 그러니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였다. 잘 먹는 것이다. 잘 먹고, 어여 쉬기.


세상이 공평한 것이라면

메뉴 선택권부터 공평해야 한다. 첫날 오후 4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는 엄마를 보자 허기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짐 보따리를 들고 찾은 고기국수 집은 문이 닫힌 상태였고, 급한 대로 삼각김밥 하나씩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올레시장으로 고고씽. 회를 좋아하는 엄마. 멍게, 해삼 같은 것이 정말 먹고 싶었던 엄마.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는 엄마와 회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1차론 순댓국을 먹기로 했다. 암, 먹는 건 공평해야지. 엄마는 살면서 먹어본 순댓국 중 가장 맛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순댓국을 싫어하는 엄마와 순댓국을 좋아하는 나는 멍게, 해삼, 소라, 전복, 문어 포장을 주문해놓고 시장 한 바퀴를 휙 돌아다녔다. 다시 횟집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툴툴이 대마왕 아빠는 툴툴대면서도 잘도 전화를 했고(하루에 몇 번씩 전화하심), 이미 나와있는지 모른 채 기다렸던 회를 급히 챙겨 엄마의 손을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린 머리를 맞대고 바닥에 나란히 앉아 포장해온 해삼 소라 따위의 맛을 봤다. 나는 익힌 문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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