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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Sep 16. 2022

상품기획 I: 신제품 기획 과정

  제품 개발 프로세스로 가장 범용적으로 사용 중인 것은 Stage-Gate 프로세스인데, 80년대 중반 기업 컨설팅을 하던 Robert Cooper(로버트 쿠퍼)가 개발하여 2000년 대 초반부터 기업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Stage-Gate 프로세스의 핵심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Stage 단계에서 기업들이 역할을 수행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는 Gate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Stage에서 그에 맞는 업무를 수행하고, 그 단계의 마지막이자 다음 단계의 시작은 Gate에서 성과를 판단하고 다음으로 갈지 말지를 의사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Stage-Gate 프로세스 ('기술경영' - 김진우 외, 박영사)


  제품을 만드는 제조 기업들은 이를 기반으로 한 제품 개발 프로세스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물론 위 그림에서 보이는 각 단계(Stage) 별 명칭과 Gate의 판단 기준은 다를 수 있으나, 큰 틀에서는 이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실제 업무에서는 제품 개발 단계에 따른 제품의 완성 수준, 신뢰성 시험 기준과 준비 자료들이 정의되어 있다. 개발 PL(Project Leader)은 단계별 산출물을 시스템에 입력한 뒤 지정된 사람들의 승인을 받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단계별 승인권자는 다른데, 검토해야 할 부서와 담당자의 직책이 달라진다.


  Stage-Gate 기반의 제품 개발 프로세스로 제품화를 진행하더라도, 어떤 시스템이든 현재 일을 모두 담기에는 한계가 있어 담당자들이 매뉴얼로 처리하는 업무가 있고, 새로운 단계를 추가해 진행하기도 한다. 큰 틀에서의 업무 방향과 흐름은 시스템에 맞춰 진행하되, 맡은 제품과 기업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형하고 조정해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시스템에만 의존한다는 건,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며 융통성 없이 고정된 마인드로 일한다는 것인데, 현재의 기업 환경의 변화 정도와 속도를 고려하면 성장과 발전을 저버리는 결정이라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는 상품기획 담당자로서 한 사이클에서의 업무를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로드맵

  상품기획 업무 흐름의 그 시작은 로드맵(Road-map)이었다. 로드맵은 미래 시간 x축 시점에 나올 신제품을 표기한 것으로, 현재와 미래 제품의 청사진이다. 로드맵을 통해 어느 시점에 신제품이 나오고, 그 제품의 핵심 성능은 무엇이며, 기존 제품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로드맵 그리기 전에는 시장 조사와 분석을 진행하였는데, 외부 기관 자료를 보거나, 영업/법인 혹은 필요시 고객까지 내외부 고객들을 선정해 인터뷰하거나, 가능한 한 많이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모은 정보를 다양하게 분석하면 시장/고객/제품의 트렌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정답이 없어 시작이 막연할 때도 있지만, 최대한 많이 모으고 다양한 방향으로 분석하면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시장 조사와 분석 결과로 ①시장/고객/제품/기술 트렌드를 도출②비즈니스 인사이트 발굴하며 동시에 ③내부 기술과 제품 수준을 파악언제/무엇을/왜, 본격적으로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로드맵을 그릴 때 필요하면 추가 조사를 하고, 로드맵과 조사를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발전시켜나갔다.

  통상 로드맵이 완료되면 개발/영업 등 관련 부서와 로드맵 공청회를 하게 되는데, 이때는 점찍은 신제품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해 갔다. 개발에는 신제품 개발에 적극 협조해 달라, 영업에는 신제품을 많이 팔아달라는 의미로. 로드맵은 미래 신제품을 정리하고, 각각 '왜'에 대한 답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로드맵은 작성한 후 반년이나 분기 주기로 시장의 변화와 내부 기술을 반영하며 지속 업데이트하며 운영하였다.



신제품 준비 시작

  로드맵 수립 후, 때가 되면 신제품 기획을 준비했다. 제품 개발 기간을 고려해 출시 시점에서 역으로 계산해 신제품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을 살폈다. 예를 들어, 23년 3월 신제품 출시 예정이라면, 그로부터 개발 기간 6개월을 역 계산해 22년 9월부터 신제품 개발이 시작되어야 하니, 신제품 준비는 그보다 2~3개월 앞서 시작하였다.

  신제품 준비 과정은 아래 두 가지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① 외부(시장/고객)와 내부(기술)를 고려해 제품 사양을 확정 

   ② 내부 부서가 다 함께 움직여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스타트 라인을 끊는 것  


  제품 사양을 확정하기 위해, 고객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경쟁사 제품 사양을 알고, 앞으로 나올 신제품 사양을 예측하였다. 이렇게 외부 환경 조사로 도출한 제품 사양이 실제 내부에서 소화될 수 있는 것인지 개발부서와 살펴보았다.

기업이 시장과 고객이 원하는 어떤 제품이든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원을 갖고 있다면 최고이겠지만, 현실은 늘 기술이 부족하고 자원의 제약과 한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과 제조력으로 시장에서 팔릴 만한 사양이 무엇인지, 그 접점을 잘 찾는 게 중요했다. 몇 번은 고객이 원하는 걸 무턱대고 내부에 밀어 넣어 곤혹을 치렀던 적도 있다. 제품화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고객에게 약속하여 Over-commitment로 신뢰를 잃었던 적도 있다.

  반면, 시장과 경쟁사를 의식하지 않고, 내부가 대응 가능한 수준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 역시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현대 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공급자 간 경쟁이 계속해서 심화되고 있고, 시장은 그 자체가 무한 경쟁으로 이루져 늘 경쟁자와 대체재가 존재하였다. 남보다 특별하지 않으면, 남보다 더 낫지 않으면, 차별점을 갖지 않으면 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현재 보유한 기술로 6개월 뒤에 출시해 향후 2~3년 동안 시장에 팔릴 제품을 만든다는 건, 미래의 판매 시점에서는 경쟁사보다 수년 뒤진 제품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상품기획 업무 초반에는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 제품이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신제품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판매될 제품인데, 현재 가용한 자원과 보유한 기술로 만들어 미래 출시 시점에는 경쟁사에 뒤쳐져, 고객사들에게 뒷전으로 밀렸던 경험이 있었다. 지금 가진 기술로 제품화하여 출시 시점에 수년 뒤쳐진 성능을 가져, 몇 개 팔지 못한 채 창고에 쌓아두기만 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후는 신제품을 준비할 때는, 시장과 고객의 요구 사양을 반영하고, 제품이 출시되어 본격적으로 판매되는 시점에서의 경쟁사의 성능과 예측 비교하고, 현재 기술이 아닌 미래 출시 시점에서의 기술력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그런 다음, 내부 부서에는 도전적 목표를 제시해 제품이 최대한 차별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신제품 사양을 확정하기까지는 내부 부서와 끊임없는 협의와 논쟁을 진행하였다. 시장과 고객 요구 사항, 경쟁사 현황, 내부 기술력, 이 세 가지 요인의 최적 접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미세 튜닝이 필요했고, 튜닝 과정에 관련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수였다. 이렇게 해야만 제품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었다. 좋은 요새에 자리 잡은 목표 사양이 발현된 신제품은 시장에서 먼저 알아 고객이 찾으며 잘 팔렸다.

   



신제품 과제 발의

  사양이 확정되면 과제 발의 단계를 수행하였다. 기업에서 가이드로 가진 과제 발의 양식을 따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채워가며 작성하였다. '(1) 과제 발의 요약 - (2) 시장/고객 현황 - (3) 신제품 사양 및 특이 사항 - (4) 과제 일정 - (5) ROI 분석 - (6) 과제 점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과제 발의 요약은 제품의 예상 경영 성과, 신제품의 핵심 성능, 중요 단계 일정, 과제 등급, 과제원 정보, 인증 여부 등이 포함된 것이다. (2) ~ (6)의 내용을 핵심어 위주로 정리한 것이라 보면 된다.


  (2) 시장/고객 현황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 마케팅의 앞 단에서 수행되는 시장과 고객 현황 정보와 경쟁사 동향이 들어가면 되는데, 여기에 '왜' 신제품이 필요한지가 명확히 소개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다음에 (3) 신제품 사양과 특이 사항을 기술하면 된다. '왜'가 설명되었으니 '무엇을/어떻게'에 대한 답을 적었다. 출시/판매 시점에서의 기술, 아직 미완성인 기술로 제품화하는 것이니 어떤 도전적 과제가 있는지 서술하였다. 신제품 과제와 함께 기술이 개발되면 제조공정이 바뀌기도 하고, 신뢰성 시험을 한 신규 장비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제품을 개발하고 양산하는 전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명확히 기록해 두면, 해당 과제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같은 눈높이에서 일을 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왜'와 '무엇을/어떻게'를 확인하였으니 '언제'를 보여주는 (4) 과제 일정을 기입한다. 과제 종류와 난이도에 따라 4~5개 등급으로 구분하는데, 등급별 과제 수행 단계들이 정의되어 있다. 각 단계들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그 단계 외 중요한 일정을, 예를 들면, 고객 판촉 시작 시점, 고객 샘플을 보내는 시점, 필수 인증 투입 일정 등, 함께 기입해 과제 관련 멤버들 누구든지 신제품 과제 일정을 숙지해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두면 좋다.


  과제 진행과 관련 사항을 정리한 후, 경영적 성과와 손익이 어떻게 되는지 예측해 (5) ROI 분석을 실시하였다. 아무리 근사한 제품이라도 시장에서 많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에게는 별 소득 없고,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도 손익이 나지 않으면 팔지 않느니 못하다. 제품의 Life-cycle, 판매 시작부터 종료 때까지의 기간 동안 예상 판매 수량과 가격을 뽑아 매출 시뮬레이션을 하고, 현재 예상 원가를 산출하고 투자비를 감안해 ROI (Return Over Investment, 투자 대비 이익)를 산출한다. 이 과제를 통해 개발한 신제품이 회사에 돈을 벌게 해 줄 것인지, 이익이 나는 것인지 예측해 인력/자본 등의 리소스를 투입할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이다.

  여기 모든 숫자를 상품기획 담당자가 직접 산출한 것은 아니다. 판매 수량은 관련 영업 담당자에게, 가격은 마케팅 가격 담당자에게, 원가는 개발이나 관리 부서에서, 투자비는 개발/제조/관리부서에서 받아 그 숫자들을 검토해 최종적으로 상품기획에서 ROI 분석을 실시하였다. ROI 분석은 과제 성격에 따라 ROI 분석 담당이 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은 앞 내용들을 바탕으로 한 (6) 과제 점수를 산출해 마무리하게 된다. 과제 점수 기준 또한 기업마다 또는 사업부마다 달랐다. 해당 기업이나 사업부가 중요로 추구하는 항목에 따라 점수 기준을 만들었다. 매출, 생산 수량, 손익률, ROI, 시장 매력도, 타깃 고객, 신제품 차별화 정도 등을 항목으로 운영하였다. 이렇게 항목별 점수를 매겨 총점을 기준으로 과제 의사결정 수준을 정했다. 예를 들면, 총점이 70점 이상이면 별다른 내부 의사 결정 없이 과제 진행, 60점 이상이면 과제 진행 여부에 대한 마케팅팀 임원급 이상의 의사결정을 받아야 하고, 50점 이상이면 마케팅 임원 의사결정 외 개발/관리 그룹장의 합의를 받아야 하고, 50점 미만은 현 상태에서는 과제를 진행할 수 없다는 기준으로 관리하였다.



신제품 회의 및 시스템 등록

  이렇게 과제 발의서를 만들고 관련 부서 담당자들을 회의에 모아 과제 발의 회의를 하고 제품 개발 프로세스 시스템에 등록하면, 상품기획 담당자가 할 일의 반은 끝났다. 과제 발의 이후는 개발과 다른 부서들이 제 일정을 지키는지 모니터링하고 이슈가 발생하면 함께 고민해 방안을 찾는 정도에서 업무를 수행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상품기획 담당자가 신제품 관련해야 할 중요한 일은 로드맵 운영, 신제품 기획(사양 확정/내부 조율), 과제 발의라 볼 수 있다. 과제 시작 시점을 이어 달리기 출발선이라 보면, 출발선에 가기 전까지의 조사와 분석, 고민과 결정의 과정, 그리고 모두 준비가 되었다면 심판의 총소리와 같은 그 시작을 알리는 역할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상품기획, 신제품 기획과 관련해 수행한 업무의 한 사이클을 정리해 보았는데, 다음 글 '상품기획 II'에서는 지난 십여 년 이상의 경험에 비추어 어떤 사람이 상품기획에 잘 어울릴지 정리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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