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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디아 Mar 04. 2023

기승전-돈

돈은 어느 선을 넘으면 삶의 수단이지만,  다다르지 못하면 삶의 목적이다

     

누군가 내게

'회사를 20년 다닌 원동력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돈'이었다고.


맛난 거 먹고, 잠잘 집 구하고, 최신형 물건 사고,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돈이 있어야 했고, 그건 누구도 거저 주지 않았다.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돈은 51%쯤의 이유였다.


첫 월급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돈, 연봉, 이런 거에 둔해 연봉이 얼마인지 몰랐는데, 입사 한 달 남짓 후 통장에 14x만원이 찍혔다. 대학시절 과외로 한 달 25~30만 원, 가끔 학원 강사로 80만 원 벌었는데, 이에 비해 상당히 큰돈이라 어리둥절했다.


첫 월급 이후, 반복되는 출근과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에 다시 둔해지기 시작했다.


한 직장에서 연차가 쌓이며 연봉도 꾸준히 계속해 올랐다. 하지만 삶을 부유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늘 돈이 부족했고 통장은 텅장이었다. 로또 1등이면 모든 돈 고민이 해결될 것 같아 간절한 마음으로 숫자 6개를 찍기도 자주.


연봉이 오름에도 늘 부족하게 느꼈던 건, 돈 씀씀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동네 밥집에서 서울 유명 거리의 식당가를 찾아다녔고, 중저가 브랜드 물건이 중고가로, 소형차가 중형차로 바뀌었다. 가족에게 목돈이 필요할 때면 고민 없이 척 내놓기도 했고, 가족 모임에서 카드를 주로 긁었다. 집도 반전세에서 전세로, 주택에서 아파트로, 전세에서 자가로 점차 커져갔다. 나이도 들고, 연차도 쌓였고, 자산도 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늘 돈은 부족했다.


입사 3개월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한편에 자리 잡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돈 벌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없었다. 내게는 대안이 없었다.

당장 그만두면 다다음 달 카드값은 무엇으로 갚으며, 전세 대출금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통장 잔고 느는 속도보다 대출금이 더 빨리 커졌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보아도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나를 20년 회사에 묶어둘 수 있었던 강력한 동인 중 하나이다.



40대에 들어서니, 계속 돈에 묶여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20대에는 혼자 세상에 나가 돈 벌 자신이 없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없었는데, 그사이 조금씩 생겨났다.

회사 일 하는 동안 쌓인 경험들로 회사를 나가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돈은 벌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가는 치열한 시간을 통해 무엇이 만족과 행복을 는지 대략적인 삶의 방향을 찾았다.


정말로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퇴사 준비하며 가장 치열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본 건 역시나 돈이다.

반복해 통장에서 자동이체로 나가는 항목과 금액을 정리해 매월 고정 생활비를 계산해 1년과 3년을 버티려면 얼마의 목돈이 있어야 하는지 계산했다.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필수 생활비 + 가변 생활비 + 용돈으로. 필수 생활비는 은행이자, 보험, 핸드폰 등 각종 요금, 집 관리비 등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 가변 생활비는 상황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식비와 자동차 기름값 등. 용돈은 그야말로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 그리고 자산 투자처에서 들어올 수익과 파트타임 일을 통해 벌 수입을 예상했다.

1년 버티기 위해 필요한 최소 현금=2,400만 원.

최악의 경우 3년 지낼 현금, 새로운 수입처를 찾지 못할 때를 대비해 3년 간 필요한 금액도 계산했다.

다행히 1년 치는 현금으로 준비되었는데, 3년 치는 현금 준비가 도저히 되지 않아 직장이 있을 때 자산을 담보로 대출해 통장에 넣어두었다. 회사 그만두면 대출도 안되니 미리 받아두었다.


이렇게 돈을 마련해 드디어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사 처음 두세 달의 씀씀이는 이전과 비슷했다. 수입이 없어졌지만 이전 습관대로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은 별 고민 없이 주문해 택배를 받았다. 퇴사 후 처음 한두 달은 하루하루가 들뜨고 즐거운 마음에 이것저것 막 샀다.


그러다 3개월 즈음 지나서 문제가 발생했다. 투자처에서 수입이 아예 안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표가 큰소리 떵떵 쳤는데 사업이 꼬꾸라지며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 3개월 차부터는 아예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하늘에서 마른번개를 맞은  눈앞이 노래졌다. 어찌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급기야 가을 학기 강의를 한두 곳 구해 추가 수입을 기대했는데, 이 역시 모두 안되었다. 사면초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퇴사 3개월 만에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제 숨만 쉬어도 나가는 비용 외는 모두 줄여야 했다. 생활용품은 다행히 그동안 쟁여놓아 아껴 쓰며 버틸 수 있고, 웬만한 거리는 차 대신 대중교통이나 걸어 다니고, 외식이나 배달음식보다는 직접 요리해 먹고, 인터넷 쇼핑과 신용카드 사용은 제로로 만들어야 했다. 겨울에는 카디건을 하나 더 걸쳐 보일러를 최대한 켜지 않았고, 온수 사용도 가능한 한 줄였다. 할 수 있는 비용 줄이기는 다 해야 했다.


매월 실제 지출과 퇴사 전 예상을 비교해 보았는데, 역시 차이가 있었다. 매월 30만 원에 가까운 건강보험료, 월급에 숨어있어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리고 급격히 올라간 금리로 증가한 이자 또한 예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가변 생활비와 용돈 역시 아껴 썼지만 지출은 발생했다. 실제  금액이 예상보다 20~30% 더 많았다.


만약 누군가 일시적 은퇴를 고려한다면, 1년 치 예상 비용에 30%의 여윳돈을 더해 두길 추천한다.


예치기 못한 상황과 변화들은 내가 일부 포기하고 감당하면 감내할 수 있다. 쇼핑, 친구들 모임, 외식, 기타 여가 생활 등. 하지만 매월 고정으로 들어가야 하는 돈,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예상보다 더 넉넉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1년 생활비에 30%의 여윳돈을 추가하고, 임시적 백수 생활을 1년 예상한다면 2년이나 3년까지도 버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두길 권한다. 회사 다닐 때는 몇 백도 금세 준비되지만 퇴사하면 몇 십만 원 마련하기도 몇 배는 더 어렵다.


돈은 어느 선을 넘으면 삶의 수단이지만,

그 선에 다다르지 못하면 삶의 목적이다.


커리어 환승역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돈은 삶의 수단이라 자신하며 퇴사했지만, 수입이 끊기니 다시 목적이 되고 있다. 여윳돈을 만들어두길 정말 잘했다. 결국 통장 잔고가 버티는 힘이다.



회사 그만둘 때 정한 금전 목표가 있다. 1년 안에 하고 싶은 일로 수입원을 만들고, 3년 안에 이전 연봉만큼 벌기. 안다. 회사 월급은 이미 갖춰진 조직 시스템에 들어가 유지 발전시키는 대가였고, 혼자서 단시간에 그만큼 버는 건 어려울 거라는 걸.

10개월이 지난 지금, 첫 번째는 약소하지만 달성이다. 이달부터 퇴사 후 찾은 일로부터 급여가 있을 거다. 금액이 크지는 않지만 하나의 물꼬가 텄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제 3년 안에 이전 연봉만큼 벌기, 목표 달성 방법을 찾고 있다.


조직 속에서 일할 때 익숙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걸 시도할 때 겪은 경험이 있다. 신규로 시장이나 응용처 발굴 업무는 결실을 보고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처음 1년은 가능성 는 6~7가지 도전 옵션을 만들어 우선순위가 높은 두세 가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2년 차 말미쯤에는 그 둘셋 시도 중 시장 동향과 고객 피드백을 통해 결실을 볼 하나, 집중할 하나를 확신하게 된다. 나아갈 방향을 찾는데 2년 여가 걸린다. 3년 차, 확신한 한곳에 집중해 시장과 고객에 미세조정하며 자원을 쏟아부으면 성과가 나타난다.

회사에서 새로운 시장이나 고객을 발굴할 때뿐 아니라, 삶에 새로운 도전을 할 때도 그러한 것 같다. 새로운 일을 찾거나 해보지 않던 무언가를 하려면, 1년 차에는 가능한 후보를 만들어 시도해 둘셋을 선정하고, 2년 차에는 그중 가장 높은 확률의 일을 찾아내고, 3년 차에는 미세조정과 함께 자원을 집중 투입해 결실 만들기. 현실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필요한 물리적 시간이다. 삶은 긴 호흡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 경험에 비추어 두 번째 커리어로 옮겨가는 목표를 잡았다.



회사 그만두고 지출을 줄이면 돈에서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지만, 사는 동안 돈에서 해방되는 건 애초에 그른 것 같다. 일할 때도, 아닐 때도 돈은 여전히 골치 아픈 존재이다, 내게는.


기승전-돈이다. 돈 때문에 일했는데, 다시 또 돈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자산 투자처 수입은 기대가 어려워졌고, 그곳에서 수입이 없으면 계속 이대로 지내지 못한다.

자산과 투자 수입으로 살기는 어렵구나, 일을 해야 하는구나, 다시 일을 하라는 신의 계시이구나...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퇴사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지금이 절실했으니까. 비록 예상치 못한 난관은 맞지만,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시간이다. 인생 전체를 보면 무채색 영혼 없는 사람보다는 고민과 걱정에 휩싸인 지금이 더 득이길 바란다.


누군가 커리어 전환을 위해 일시적 백수 생활을 계획한다면, 돈에 대해, 처음 1년은 "[필수 생활비+가변 생활비+용돈] x 1.3" 만큼 현금을 통장에 넣어두고, 최대 3년 버틸 자금을 마련해 두길 권한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 대부분 포기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은 그럴 수 없다. 쉽게 다시 수입을 만들지 못한다.

돈을 번다는 건 가치를 만들고, 대가로 타인으로부터 금전을 받는 거다. 상대가 있어야 하고 내 가치가 상대에게 인정받아야 하는데 한 번에 되지는 않는다. 걸어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으니까.


 길에 뿌리내리기 위해 일정 기간 버티는 뚝심이 필요하고, 통장 현금은 버티는 힘이다.


돈은 추상화 같다.

알듯 한데 모르겠고, 뭔지 잘 모르지만 자꾸만 찾아가게 만드는.


씁쓸하지만, 내 삶은 기승전..... 돈이다.


독일 미술관에서 찍은 추상화 두 점 - 알듯 말듯한 게 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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