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잡문 67 - 우리가 빗물이라면

by 백홍시

비 내리는 날에는 괜히 나가 걷기도 해.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듣고 싶어서.
나가기가 귀찮으면 창문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이지.
빗소리가 고파서.
마음이 갈라질 땐 더더욱 그래.

빗방울들이 제 몸을 부딪히며 울부짖는 소리.
망설임도 없이 세차게 부딪힌 큰 빗방울은 수십 개의 작은 빗방울들이 돼.
부딪혀 갈라진 빗방울들은 작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빗물로.
빗방울은 갈라져도 빗방울.
부딪혀도, 깨져도, 작아져도, 빗방울.
그래. 아무리 작아도 빗방울이라 이거지.

오늘도 나는 너희들의 비명을 배경음악 삼아 상념에 잠겨 있어.
조금 잔인하구나. 미안해.
자, 공평하게 생각해 보자.
나도 어쩌면 하늘에서 왔을지 몰라.
하늘에서 이 세상에 뚝 떨어져, 나무에 부딪히고 벽에 부딪히며 울부짖고 있는 걸지도 몰라.
세차게 부딪혀 깨지고 작아졌다가 다시 모여 흐르는 동안 나도 계속 빗물이라면.
구르고 깨지고 아무리 작아져도 나는 그대로 나라면.
그렇다면 나도 너희처럼 마음껏 부서져 볼까?
나는 이제 내가 나인 것이 더 이상 싫지만은 않거든.

우리가 빗물이라면.
우리는 태초에 모두 같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우리가 빗물이라면.
내가 빗방울이라면.
방울이라는 귀여운 이름 뒤로, 유리창에 대차게 부딪힐 용기를 숨기고 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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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우리 언젠가 바다에서 만나자.
각자 다른 곳에서 흘렀더라도 하나 되어 증발되자.
부딪혀 깨진 상처들일랑 모두 잊고 날아가자.
깃털보다 가볍게.
새들보다 더 높이.

자, 그럼 언젠가 가뿐히 증발되어 다시 하늘로 갈 날을 기다리며 몸을 힘껏 내던져 볼까?
잠깐.
증발돼도 다시 뭉쳐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에이. 그건 싫은데.
증발되고 사라져 의식조차 없는 비존재가 되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빗방울 하나가 오늘도 여기.
비들의 울부짖음을 노래처럼 감상하는, 언제나처럼 인정머리 없는 빗방울 하나가 여기.
부딪히고 깨지며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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