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잡문 70 - 지금 여기, 정식집 밥

by 백홍시

다닌 지 8개월 남짓 된 지금의 회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바로 적당한 개인주의다.

특히 우르르 같이 나가 밥을 먹거나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회식도 일절 없다.)

몇몇 이유로 남과 밥 먹길 꺼려하는 나는, 덕분에 점심시간을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밥을 먹기 싫으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울 수도 있고, 오늘 뭐 먹냐는 상의 없이 내 맘대로 메뉴를 결정할 수도 있다.

한동안은 회사 근처 맛집들을 찾아 헤매다가 요즘은 한 곳에 정착(?)을 했다.

밖에서 먹는 집밥 느낌의 정식집이다.


가게는 아주 작다.

테이블이 다섯 개 남짓. 나이 드신 사장님께서 혼자 요리와 서빙과 계산까지 하신다.

반찬은 대여섯 가지가 뷔페식으로 되어 있. 당연히 셀프.

반찬을 떠 오면 사장님이 밥, 국, 그리고 생선구이 한 마리를 가져다주신다.

다른 메뉴도 있지만 부분이 정식을 먹는 것 같다.

빨리 먹고 가야 하는 직장인들이라 그렇겠지.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주문하는 소리를 듣는 일이 잘 없다.

그저 들어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하면 그것이 '정식 1인분 주문'인 셈이다.

말없는 손님들은 인사도 목례로 때우고는 바로 반찬을 뜬다.

여느 정식집이 그렇듯이 이곳 또한 반찬과 국의 구성이 매일 바뀐다.

나물, 소시지, 어묵, 버섯, 호박잎이나 깻잎 찐 것도 종종 주시고 생야채도 주신다.

생선도 가자미부터 고등어까지 매일 다르다.


매일 바뀌는 국과 생선, 각종 반찬들을 단돈 5500원에 맛볼 수 있다니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다.

저렴한 것도 저렴한 것이지만, 사실 혼자 사는 처지에 반찬이 매일 바뀌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니 말이다.

반찬 하나를 해놓으면 없어질 때 까지는 같은 반찬을 먹어야 는 것이 1인 가구의 숙명.

그래서 회사 근처에서 이 저렴한 정식집을 발견했을 때 쾌재를 부른 것이다.


주변의 직장인들 이래 봐야 뻔하고, 점심시간도 매일 같다.

그러다 보니 같은 얼굴들을 매일 보게 된다.

이야기는 나누지 않지만 마치 하나의 식사팀 같다는 오버스러운 생각도 종종 해 본다.

가게가 작으니 합석은 당연지사.

아무도 불만 가지지 않고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자리가 없으면 그냥 아무 빈자리에 앉는 것이다.

앞에 누가 앉아있든 양해도 구하지 않는다. 불문율이니까.


정식집 밥. 버스 안에서 실시간 드로잉.


가끔 손님이 없으면 사장님이 말을 걸어오신다.

호구조사를 당하기도 하고 근황 토크를 하기도 한다.

세계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여행광 사장님은, 저녁 퇴근 후에는 매일 헬스장에서 러닝을 하시는 차도녀이시다.

사장님의 말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사장님의 따님께서 자궁의 염증을 레이저로 제거하셨다는 소식까지 들은 후에야 가게를 나올 수 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가게에 질색을 했을 것이다.

밥 먹는데 누군가에게 말 걸리는 것도 싫고, 합석은 더더욱 극혐이었으니 말이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메뉴로도 커버가 안돼서 아마 며칠 다니다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나는 이 가게를 아주 좋아한다.

합석도 나쁘지 않고, 서로에게 어쩐지 익숙해진 듯한 주인과 손님들도 재밌고, 대부분 혼자 와서 각자 식사에만 집중하며 먹는 모습들도 좋다.

한마디로 조금 정겹다고 할까?

어차피 점심시간에만 만나는 인연, 가까운 척 떠들어도 거부감이 없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가게를 정겹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언제부터 호구조사가 별스럽지 않고, 웃으며 두루뭉술 넘어갈 수 있게 된 걸까?

우연히 알게 된 20대 중반의 예민한 여자분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속으로 조금 웃었다.

잠깐. 이런 중년 같은 생각은 또 언제부터 하게 된 거지?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군. 허허.' 따위의 나이 먹은 듯한 생각을 대체 언제부터 하게 된 거냔 말이야.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는 변했다.

가끔 오래전 인연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한다.

예전에 알던 나쁜 사람들, 까칠해서 재수 없던 누군가도 어쩌면 지금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반대도 물론 가능성이 있다.

어릴 때 알고 지내던 천사 같던 아이도 지금은 영 다를 수도 있겠지.

전에 알던 내가 아냐!

유행가 가사에도 진리는 담겨 있다니까.

어제의 나는 사라지고 나는 늘 오늘의 나.

매일 아침 새로 태어난 깨끗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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