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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홍시 May 26. 2021

잡문 115 - 00시 00분

자주 입는 옷들을 걸어두는 행거에서 경량 패딩을 꺼냈다.

아가일 패턴이 그려진 초록색 니트조끼도.

엊그제는 자다가 너무 더워 벌떡 일어나서는, 이불장에 잠자던 여름이불을 깨워 끌어안고 잤다.

얼마 전까지 함께 잠들던 전기요는 이별한 지 오래다.

친구가 선물로 준 화분에서 여리디 여린 새 잎이 나고, 나의 레몬 오렌지 나무에서는 또다시 꽃이 피고 있다.

시간이 가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량 패딩과 니트조끼를 빨래 바구니에 넣어 두고 나니, 라디오에서 자정을 알린다.

오늘은 또  어제가 되어 사라졌다.

나의 2021년 5월 25일이.

별다른 것 없던 또  하루가 사라지는 것은 그다지 슬플 일이 아니지만,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라디오에서 자정을 알려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전에 자주 듣던 심야 라디오의 디제이를 했던 아나운서다.

같은 방송사에 이 아나운서와 목소리가 아주 비슷한 아나운서가 있어서 긴가민가 하지만, 아무튼 그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예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무척이나 애정을 쏟으며 청취했던 고정 청취자였다.

매일 같이 사연을 올리고, 소개되기도 여러 번이었다.

심야 라디오 특성상, 사연이 소개된다고 풍성한 선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디제이와 다른 청취자들과 소통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왜 그럴 때 있잖은가.

고민이나 좋은 일, 또는 자랑하고 싶거나 위로받고 싶은 일을 주변에 이야기를 해도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 못할 때.

사실 나는 평소 인간관계가 좋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아무튼 그럴 때야 말로 라디오가 있다는 것이 오아시스 같다.

 프로그램이 과거로 사라졌던 순간, 서운하다 못해 눈물이 났던 것은 그래서였다.



자정 얘기를 하다가 웬 딴소린가 싶겠지만, 아무튼 라디오를 들으며 맞이하는 자정이 나에게는 더 쓸쓸하다는 얘기다.

오늘이 어제가 되는 시간을, 나에게는 그리운 과거인 디제이의 목소리로 듣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안겨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만화일기를 그리던 책상, 침대도 커튼도 없던 원룸, 고장 난 전기장판 따위가 한순간에 번개처럼 마음에 번쩍인다.

번개 맞은 마음 위로 별스럽지도 않던 오늘을 포개어 흘려보내는 자정.


떠올려보면 요즘의 날들은 기억 속에 남아있지도 않다.

최근의 기억보다 더 예전의 기억들이 오히려 생생한 것은, 그  기억들에 너무 많은 공간들을 내어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수없이 과거로 보낸, 이제 생생하지도 않은 오늘들이 갑자기 너무 아쉬워지는 밤.

그렇게 아쉽듯 살지도 않은 주제에 우스운 일이다.

내일은 또 어떨까.

또 별스럽지 않겠지 뭐.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릴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한밤에도, 식물들은 여린 잎을 짙게 물들이고, 뭉쳐있던 꽃잎들을 영차영차 벌리고 있다.

식물들은 내일을 의심하지 않겠지?

그저  물이 들면 물을 마시고, 햇빛이 들면 받아들이고, 그렇게 오늘을 사니까.


내일은 제철 지난 옷들을 세탁하고 여름옷을 꺼낼 것이다.

가방에는 곧 작은 선풍기도 들고 다닐 것이고, 뜨거운 햇빛 아래 마시는 얼음 음료 한 모금을 상상해볼 것이다.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지난 계절의 기억들을 남겨놓았기 때문.

과거의 용도는 딱 거기까지다.


소복소복 쌓이는 과거의 미련들을 휘휘 쓸어버리고, 새 기억을 쌓을 공간을 만들기.

매일 00시 00분이 되면 그러고 싶다.

그럴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자정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더 이상 가슴 찌릿하지 않은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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