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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07. 2023

내 자리를 지키기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7: 롯데의 우천 경기를 보며 든 생각>

 

그림책 전집 편집을 하고 있다. 며칠 전, 너덜너덜 발린 날. 편집 마지막 단계에서 말도 안 되는 수정 사항이 계속 나왔다. 속상하다. 이사님 카톡이 올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매 페이지에 넣기로 약속한 그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인하라고 한 이사님 카톡을 보며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을 하며 파일을 열었다. 으악! 없다, 없어. 이럴 리가. 초기 데이터를 찾아보니 거기엔 있다. 언제 빠진 거지. 왜 몰랐지. 구성을 여러 번 바꾸고 수정이 잦았던 탓이다. 난 자꾸 남 탓을 하고 싶다. 너무 남 탓을 하고 싶다. 그러나 다른 베테랑 편집자에게서는 그런 수정 사항이 나오지 않는다. 

‘역시 이 일은 나랑 안 맞아.’

‘그만둔다고 말할까. 남은 비용은 안 받아도 된다고 할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얼마 전, 집에 샴푸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마트에 가서 샴푸를 사 왔다. 아이가 학원에 다녀와서 씻으러 들어가려다 나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샴푸 사야 해.”

난 딸에게 브이 포즈를 하며 말했다. 

“엄마가 그럴 줄 알고 딱! 사놨지. 예전에 쓰던 샴푸 옆에 있으니까 그거 쓰면 돼.”

아이는 나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오면서 하는 말. 

“엄마, 샴푸가 아니라 린스 사 왔던데?”

그 뒤로 남편은 나에게 ‘린스 김** 선생’이라고 부른다. 뭐 이런 일은 자주 있는 편이다. 버스를 잘못 타고 기차표를 내려가는 표만 두 장 끊고 뭐 그런 일. 그런데! 그런 내가 세상 꼼꼼해야 하는 편집을! 당치 않은 소리다.


      

이 기획사 대표의 마무리 스타일이 사람을 엄청 힘들 게 한다는 것도 이제야 생각났다.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으로 가다 식탁에 앉아 쉬고 청소기를 돌리러 가다가 소파에 다시 앉는다. 진이 빠진다. 이 힘든 걸 누구에게 넘기나. 내가 실수한 것도 있을 텐데, 내가 직면해야지. 하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서울은 비가 계속 왔다. 야구가 우천취소 될 줄 알았는데 지방은 괜찮은지 롯데와 기아의 경기가 진행됐다.(09.14) 처음부터 조금씩 비는 내리고 있었는데 점점 빗줄기가 거세진다. 선수들은 쏴. 하고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경기를 한다. 처음부터 별기대를 안 했는데 롯데는 3회에서 3점을 냈다. 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많이 오는 것 같은데 경기는 계속된다. 선수들은 그 와중에서도 열심히 치고 달리고 잡는다. 힘들어 보인다. 요즘 환절기라 내 주변에선 감기, 알레르기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비를 저렇게 맞고도 선수들은 괜찮을까. 결국 6회 말에 경기는 중단됐다. 스코어는 3: 1.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결국 경기는 밤 10시쯤에 그대로 끝나는 걸로 결정됐다. 롯데의 승리. 끝날 줄 몰랐는데 끝났다. 오, 러키다!      



갑자기 예전 일이 기억났다.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극기훈련을 갔다.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애들이 똑같아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극기훈련은 아주 힘들었다. 매일 책상 앞에서 자고 먹고 공부하던 애들이 갑자기 땡볕에서 앞으로 엎드리고 뒤로 엎드리고 폴짝폴짝 뛰니 힘든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나선 행군을 얼마나 했더라. 산을 오르내렸는데 너무 목이 말랐던 기억이 난다. 중간에 쓰러져서 실려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힘들게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운동장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다 널브러졌다. 


훈련 교관이셨던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이제부터가 진짜 어려운 훈련의 시작이라고 했다. 진짜 힘들 테니 못할 것 같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너무 힘든데 포기할까. 그래도 그냥 할까.’

한 명, 두 명, 세 명, 아이들이 앞으로 나간다. 선생님은 충분히 시간을 주신다. 난 자리에 남기로 했다. 여태까지 한 게 아까워서다. 한참 뒤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말씀하셨다.

“자, 사실 훈련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지금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우아!”

운동장에 그대로 남아있던 아이들이 큰 함성을 질렀다. 난 너무 기뻐 폴짝폴짝 뛰었다. 



가끔 그때가 기억난다. 롯데의 우천 경기처럼 끝난 줄 몰랐는데 끝났다. 힘들었지만 그때 그 자리를 지켰던 경험으로 지금 또 내 자리를 지킨다. 

‘이 프로젝트 끝나면 편집 일 때려치울 거지만, 어쨌든 지금 그만두지는 않아야지.’     

비바람이 힘든 것도 참고 내 자리에서 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어머, 끝났어? 오, 게다가 결과도 좋아?’ 이런 일이 나에게 또 일어나겠지. 일어나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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