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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3. 2023

흐름이 끊기는 시간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8>

야구경기를 직관하다 보면 집에서 중계로 볼 때보다 더 잘 느껴지는 게 있다. 바로 기세의 흐름이다. 기세가 이쪽으로 넘어왔구나. 저쪽으로 넘어갔구나. 하는 것. 주도권이 우리 편에 있을 때는 응원 소리도 크고 선수들의 플레이도 거침이 없다. 그런데 주도권이 상대편에 있을 때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긴장 때문인지 선수들의 실책이 나오곤 한다.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는 처음의 기세가 끝까지 가기도 한다. 직관까지 갔는데 하필 기세를 잃은 쪽이 우리 팀일 경우엔 무척이나 집에 가고 싶다. 

“아니, 상대편 팬들이 저렇게 많았어?”

“그러게, 엄마. 아까는 저렇게 안 많았던 거 같은데. 응원 소리가 엄청 커.” 

우리 팀이 이기고 있을 때는 신경도 안 쓰이던 응원 소리가 분위기가 넘어가면 신경 쓰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신경 쓰이는 걸 넘어서서 눌린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상대편의 응원가를 따라 하기도 하고, ‘아, 저 응원가 탐나네’ 하며 상대편의 응원가 중 제일 좋은 응원가를 딸과 함께 고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기운 빠진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딘다)


     

보통의 경기에서는 기세가 왔다 갔다 한다. 한 팀이 시작부터 끝까지 쭉 끌고 가지는 않는다. 야구의 한 경기는 9이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이닝은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더그아웃에서 정신을 차릴 시간이 있다. 경기의 흐름이 잠시 끊기고 침착해진 선수가 다음 이닝에서 안타를 친다. 경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한껏 줌을 당겨 찍은 롯데의 더그아웃. (NC 파크에서) 

     

축구 같은 경우, 경기의 주도권을 빼앗기면 주도권을 가져오는 게 야구보다 훨씬 어렵다. 경기가 전반, 후반 이렇게 두 부분으로만 나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야구장 직관 갔을 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긴 했지만, 빼앗긴 기세를 다시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닝이 바뀌고 동점이 되면서 기세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우리 팀 팬들은 마치 우리가 이긴 양 신이 났었다. 다시 나중에 흐름이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경기를 하는 두 팀이 경기의 주도권을 주고받는 걸 보면서 공격과 수비가 바뀌는, 잠깐 정신이 환기되는 그 짧은 시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5이닝이 끝나면 6이닝 전까지 쉬는 시간이 조금 더 길다. 그때 선수들은 모두 나와 그라운드에서 몸을 푼다. 


내가 어떤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하지 않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만 매달리지 않고 잠깐 쉬며 호흡을 고를 시간. 정신을 차리고 점검할 시간. 그런 시간은 내 하루에도 꼭 필요하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나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면 방향을 잃게 된다.    


  

 예전에는 아이와 자기 전에 하루 중 감사한 걸 말했다. 아이는 급식에서 좋아하는 게 나와서 감사했다거나 체육 시간에 재미있는 활동을 해서 감사했다는 등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짧지만 하루를 잠깐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혼자 자기 시작하면서 그 시간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아이와 저녁 먹을 때, 예전처럼 오늘 하루 중 감사한 걸 이야기해 볼까.’      

저녁 식사 시간. 아이가 요즘 재밌다고 하는 드라마 얘기를 하고, 남자 주인공이 자기 스타일이라고 말하고. 난 그러냐.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할 타이밍을 노린다. 난 오늘 계란을 냉장고에서 꺼내다 떨어뜨려서 계획에 없던 계란말이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네가 계란말이를 맛있게 먹어주어 기쁘다고 했다. 그게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넌 오늘 하루 중에 뭐가 제일 감사해?”

와, 자연스러웠다. 아이는 고민하더니 말했다. 

“오늘 엄마 없는 동안에 태연 노래 연습했거든. 고음이라 잘 안 됐는데. 오늘은 잘 되더라고. 그게 감사한 일이야. 계속 잘 되면 내가 좋아하는 가수 소속사에 영상 보내볼까 해.”

“뭐? 노래 부르는 영상을?”

“응.”

아이의 노래 실력을 익히 아는 나는 하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다.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 해 봐.”     



아이는 감사한 걸 또 하나 말한다. 오늘 하루 아이의 시간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단지 감사한 걸 이야기한 것뿐인데 하루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별 것 아닌 이 시간이 쌓여 아이와 나의 일상을 탄탄히 잡아주었으면.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더그아웃에서 잘하면 잘한 대로 못하면 못한 대로 마음을 다잡는 그 시간이 우리 집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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