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프 Oct 17. 2023

내 등에도 번호가 있다면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9>

   야구 선수 유니폼 등에는 번호가 있다. 선수들의 등번호를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사실 모든 사물을 유심히 보지 않는 편이다) 직관을 간 어느 날, 롯데 선수들의 등에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날 선수들은 유니세프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 유니폼의 특징은 등에 선수들의 이름은 없고 번호만 들어간다는 거다. 



“저 선수 누구야? 응?”

등번호를 외우지 못한 나는 옆에 있는 딸에게 자꾸 선수의 이름을 물었다. 

“엄마는 선수들 등번호 모르는 거야?”

무시하는 듯한 딸의 반응. 흥, 내가 등번호 다 외우고 만다.     

유니셰프 유니폼을 입고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 잘 보이진 않지만, 번호만 있고 선수 이름은 없다. 


그래도 아는 등번호 두 개가 있다. 전준우는 8번, 윤동희는 91번. 전준우는 자신의 등번호에 큰 의미는 없고 선배가 추천해 준 번호라고 했다. 윤동희는 아버지가 사회인 야구를 하시는데 아버지의 등번호가 91번이라고 했다. 아빠의 등번호를 자기가 그대로 쓸 수 있어서 너무 좋고 바꿀 생각이 없다고 한다. 등번호는 한 번 정하면 거의 안 바꾸는 줄 알았는데 22년과 23년도 롯데자이언츠 선수들의 등번호를 비교해 보니 바뀐 선수들이 꽤 된다. 초심을 일깨우겠다며 고등학교 때 달던 번호로 바꾸기도 하고 부진이 이어지거나 부상 이후에 바꾸는 선수들도 있다.      



처음 야구에 등번호가 도입된 건 1929년 뉴욕 양키즈 선수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등번호는 개막전 선발 라인업 순서였다고 한다. 타순이 첫 번째면 1번, 두 번째면 2번과 같은 식이었고 11번부터는 투수들의 번호였다. 그러나 현재는 주로 개인에게 의미가 있는 숫자를 등번호로 사용한다. 야구 구단은 위대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고 있다. 현재 롯데 자이언츠는 이대호 선수의 등번호였던 10번과 최동원 선수의 등번호였던 11번이 영구결번이다.   


   

만약 나도 등번호를 정해야 한다면 몇 번으로 할까? 아무도 나에게 정하라고 한 적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혼자 심각하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숫자는 과연 무엇일까. 고민 또 고민.

“넌 네 등번호를 정해야 한다면 몇 번으로 할 거야?”

생각이 안 나면 항상 딸에게 물어본다. 역시 이번 질문도 딸의 대답은 거침이 없다. 

“81”

“어, 왜? 81로 정한 이유가 뭐야?”

“내 생일이 8월 1일이잖아. 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81’로 하는 거지.”

아하,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군.     

대부분의 팬들도 자신이 입은 유니폼에 응원하는 선수의 번호와 이름을 마킹한다. 


한 자리 숫자로 하기는 괜히 싫고 두 자리 숫자 중 의미 있는 숫자를 생각하니 가장 먼저 28이 떠오른다. 왜 28이냐면 중학교 1학년 때 내 번호가 28번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땐 성의 기역니은 순서로 번호를 정했는데 중학교에 가니 키순으로 번호를 정했다. 

“자, 모두 복도로 나와서 한 줄로 서.”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은 복도로 나와 서로의 키를 재어보며 한 줄로 섰다.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멈췄다. 나보다 작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내 키를 추월했다. 초등학교 근처의 중학교여서 같은 초등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꽤 됐는데 그들은 내 키가 평균 또는 평균보다 살짝 작은 편에 속하게 됐다는 걸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까치발을 하다가 실내화를 구겨진다가... 겨우 중간 이후의 번호 28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번호 중 제일 뒷 번호였던 28번. 


     

그렇다고 28을 등번호로 하기엔 명분이 부족하다. 또 어떤 번호가 있을까. 99학번이니까 99? 류현진은 한화에서 신입 선수였던 99년도에 우승을 해서 그때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의미로 등번호를 99로 정했다고 한다. 나는 99학번인 걸 빼면 그해에 기념할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니 99도 애매하다.      

그러다 마음에 든 번호가 있었으니, 바로 22! 내 생일이 22일이기도 하고 난 숫자 2가 좋다. 혼자서는 잘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도 누가 옆에 있으면 할 만해진다. 그리고 난 이인자가 좋다. 일인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학생 때도 항상 반장보다 부반장이 좋았다. 가장 높은 곳은 부담되고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옆에 있는 아이에게 내 등번호를 22로 정했다고 말했다. 

“에이, 뭐 그냥 생일이네.”

“아닌데? 난 이인자가 좋아서 그런 건데? 그리고 혼자 있을 때 못하는 것도 둘이 있으면 서로 도와서 할 수 있고 힘도 나잖아. 그 둘을 의미하는 숫자 2가 두 개 있어서 22라고 한 건데?”

“그래.”

아이의 시큰둥한 반응. 하지만 뭐 상관없다. 지금 내 머릿속에선 22의 좋은 점이 계속 떠오르고 있으니까. 둥글둥글한 게 이 세상을 둥글둥글 잘 살아갈 것 같고 어려운 일도 둥글둥글 잘 헤쳐갈 것 같다. ‘0’처럼 너무 철없이 둥그렇지만은 않고 끝부분의 맨 밑의 조금 뾰족한 부분도 마음에 쏙 든다. 헛소리 하는 사람들을 저 뾰족한 부분으로 콕 찔러줘야지.      

자세히 보니 오리 두 마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리 두 마리가 유유히 연못을 떠다니는 여유가 느껴지는 22. 사랑스러운 22는 이제 내 번호다!   


   

당신의 등번호는 몇 번인가요?     

이전 07화 흐름이 끊기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