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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8. 2023

스포츠의 힘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10>

얼마 전 일이다. KBO 신인 드래프트를 남편과 딸은 집에서, 난 카페에서 핸드폰으로 봤다. 집에 오자마자 남편에게 물었다.

“봤어?”

난 목적어도 없는 말을 툭 던진다. 직구.

“봤지. 울컥하더라.”

남편은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내 말이 글러브 안으로 쏙. 스트라이크!     



각각 따로 본 신인 드래프트의 소감을 나눈다. 롯데가 1라운드 지명한 전미르 선수는 투수도 타자도 되는 선수라 한국의 오타니라는 별명이 있다는 얘기, 2라운드에 지명한 선수는 최강 야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정현수 선수라는 얘기. 현장에 있던 선수 중 가장 늦게 지명된 원종해 선수 얘기와 선수의 아버지 인터뷰를 보며 울컥했다는 얘기. 소감 나눔이 끝나고 서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거 알아? 신인 드래프트 전에 기자들이 쓴 예상픽과 1라운드 지명이 거의 일치했어.”

“그거 알아? 나 NC파크 갔을 때 구경 온 최강야구 선수들 봤다고 했잖아. 그중에 정현수 선수도 있었어. 사진도 찍었지롱. 보여줄까?” 

“신인 드래프트로 프로 구단에 가면 그 구단에 얼마 동안 묶여있는 줄 알아?”

앗. 모르겠다. 남편의 얼굴이 한껏 의기양양해진다. 

“7년 동안 묶여 있어. 매년 연봉협상을 하겠지만 어쨌든 다른 구단으로 옮기진 못하는 거지.”

내 유니폼 등에는 아무 선수의 이름도 마킹되어 있지 않은데 이참에 신입 선수 이름을 마킹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 유니폼에 마킹한 선수들-손아섭, 강민호-이 이적을 해서 유니폼 두 벌을 버린 경험이 있다)    


 

대화는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이어진다. 평소에 남편과 나는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사이가 아니다. 가장 많이 하는 대화 주제는 “오늘 저녁 뭐 먹을까?”였는데. 신인 드래프트를 보고 한 시간 넘게 대화하면서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학원에 다녀온 딸이 합류하고 딸은 아까 남편과 얘기했던 원종해 선수 얘기를 또 한다. 현장에 있던 선수들이 다 지명되고 그 선수만 남아 안타까웠는데 7라운드에서 지명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아빠랑 같이 그 선수를 계속 응원했다고.    


  

다른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이 참 귀하다. 나는 어디선가 하위 지명 선수인데 프로에 와서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오, 두산의 양의지가 8라운드 지명, 롯데의 유강남이 7라운드 지명, 롯데의 이정훈은 10라운드 지명. 이전의 실력이 꼭 이후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난 검색한 내용을 바로 가족들에게 말하고, 가족들은 ‘오~’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말이야. 결과에 실망하지 말고 뭐든 꾸준하면 돼. 알겠지?”

아이에게 한 말이지만, 말을 뱉고 보니 나 스스로에게 한 말 같기도 했다.  


    

키움과 롯데의 경기가 있을 때 찍었던 고척돔구장. 여름엔 덥지 않고 시원해서 자주 간다. 

추석 때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야구 얘기를 했다. 아빠는 추석 전 키움과 기아 경기를 직관하고 오셨다고 했다. 돔구장은 처음이었는데 쾌적했고 기아가 큰 점수 차로 이겨 오랜만에 간 직관 경기가 재미있었다고 하셨다.

“아빠, 기아가 떨어져야 롯데가 올라가요. 아쉽지만 저희가 가을 야구 갈게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아이쿠, 그러냐.”라며 아빠가 웃었다. ‘요즘 별일 없냐, *서방 일은 잘되고 있냐’와 같은 단골 명절 질문을 넘어 야구 주제로 대화하며 둘 다 진심으로 즐거웠다. (아쉽게도 기아도 롯데도 가을 야구를 못 가게 되었다. 롯데가 떨어지면 기아를 응원하려고 했는데.)      



스포츠 기자 릭 라일리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지도 교수로부터 "스포츠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라일리는 그 경험을 2007년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에 기고한 칼럼에서 다루면서 '귀하의 보스턴 레드삭스 기사를 두고 아버지와 대화를 했습니다. 5년 만에 처음인 부자간의 대화였습니다'로 시작하는 20대 청년이 보내온 이메일을 소개하고는 "교수님, 30년이 지났어도 제가 스포츠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란 말로 답변했다. 이것이야말로 스포츠의 스토리가 갖고 있는 힘이다. (<불멸의 철완 최동원>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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