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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22. 2023

아이와 거리두기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12>

 이번 프로야구 정규시즌에 온 가족이 함께 야구장을 열한 번 다녀왔다. 아이가 야구에 흥미가 없을 때는 일 년에 고작 한두 번이었던 걸 생각하면 아이의 흥미가 우리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집순이인 아이는 여행을 가자고 해도 뭘 같이 하자고 해도 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하는데 오직 야구에만 적극적인 반응을 한다.  사춘기인 아이가 자기 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서 함께 야구를 보고, 야구 주제로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야구는 13살 사춘기 아이와 우리(남편과 나)를 잇는 대화의 끈이다.     



어느 날 야구 직관을 갔는데 우리 앞자리에 여고생 세 명이 앉았다. 까르르 웃으며 열심히 응원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그 모습을 보던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애도 나중에 친구들이랑 저렇게 야구장에 오겠지?”

“그렇겠지.”

그 대답을 하고 나서 갑자기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에 나도 놀랐다. 무의식 중에 야구장 직관은 가족끼리 오는 일상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나 보다. 난 내 마음을 감춘 재 옆자리에 앉은 딸의 마음을 떠봤다.

“너도 친구들이랑 오고 싶은데 롯데 팬이 없어서 못 오는 거지? 안타깝네.” 

“뭐, 그렇지.”

‘그렇지라고? 그렇지라니. 엄마, 아빠랑 오는 게 좋아서 오는 건데.라고 해야지. 흥!’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아이가 어릴 때 쉬지 않고 ‘엄마, 엄마’하고 불러대서 ‘아, 엄마란 단어를 없애버리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편이 생일 선물을 뭐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이제 와 이렇게 아이와 이렇게 거리 두기를 못 할 일인가.


     

인천 문학 구장에 직관 갔을 때 일이다. 그날은 롯데가 SSG에 지고 있었다. 롯데의 응원가를 부를 만하면 공격이 끝나고, 또 부를 만하면 공격이 끝났다. SSG의 응원가만 하염없이 듣고 있는데 딸이 옆에서 SSG의 최정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게 아닌가. 

“엄마, 최정 응원가 중독성 있지 않아?”

“그렇긴 하지.”

나도 딸과 함께 흥얼거렸다. 딸은 최정 응원가 말고도 SSG의 다른 선수들 응원가를 쭉 따라 부르다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나 소민 언니랑 SSG 경기 보러 오면 안 돼? 우린 가을 야구 못 가니까 SSG 응원하려고.”

순간 멈칫했다가 유치한 공격을 했다. 

“너 돈 있어? 돈이 있어야 야구장 표도 끊고 야구장에 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하지. 그리고 집이랑 문학 구장이랑은 멀어서 전철 타고 여기까지 오는 것도 위험해.”

“그런가.”


공격할라치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다행히 아이는 ‘그런가’하며 넘어갔다. 돈 얘기를 꺼내다니 정말 낮은 수의 방어였다. ‘넌 돈이 없으니 우리랑 같이 와야만 야구를 볼 수 있어.’란 후진 말을 내뱉은 것이다. 게다가 그 소민 언니는 고등학생.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을 테니 사실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다.      

가족끼리 함께 갔던 첫 원정 응원 경기장, NC파크. (여긴 정말 친구들이랑만 오기는 힘들겠지? ㅋ) 


지난 일요일, 아이의 합기도 대회가 있어 대회장에 갔었다. 대회가 끝나고 아이가 한 언니의 손을 붙잡고 나에게 온다. 

“엄마, 이 언니가 소민이 언니야.”

인상이 참 좋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네가 소민이구나.”

그때,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 

“저 방방이랑 SSG 경기 보러 가면 안 돼요?”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뭐 가면 좋지.”

소민이와 딸은 서로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뛴다. 그래, 가라 가.     



아이에게는 아이의 삶이 있고 난 나의 삶이 있다. 나도 내 친구들을 만나고, 남편은 남편의 친구들을, 딸은 딸의 친구들을 만난다. 아주 자연스럽다. 딸이 독립된 개체로 잘 자랄 수 있게 이젠 그냥 아이의 뒤에 든든히 있어 주면 되는 거겠지. 사실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남편에게 딸이 합기도 선배와 문학 구장 직관을 가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남편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포스트시즌 표 예매가 상당히 어려울 텐데. 예매 시작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다가 폭풍 클릭을 해야 할 거야. 파이팅!”

남편도 나도 대신 표를 끊어주겠다고 하지 않는다. 아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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