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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키가 뭐라고.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성장판 검사.

by 수프

딸의 방학이 막 시작됐을 때였다. 늘어지게 늦잠을 잘 줄 알았던 딸이 평소와 비슷하게 일어났다.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뭔가 분주하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 친구랑 만나서 줄넘기하기로 했어.”

갑자기 왜 줄넘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이는 바로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키 크려고 하는 거야. OO네 엄마가 키 크는데 제일 좋은 운동이 줄넘기라고 했거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방학인데 이른 아침에 만나 줄넘기하는 아이들이 신기하다.


내 키는 158cm.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지금의 내 키다. 쑥쑥 크다 거기서 멈춰 버렸다. 중학교 2학년 땐가. 반이 바뀐 첫날,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해야 해서 복도에 나가 키대로 줄을 섰다. 난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고 싶어 실내화를 꺾어 신었다. 이런. 나보다 작았던 아이들이 다 내 키를 추월했다. 친구들은 날 내려다보며 “너 어쩌다 이렇게 됐니?”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팔을 내 어깨에 휙 둘렀다.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 와서 엄마가 키가 작아 나도 작은 거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키 작은 유전자는 내가 다 써 버려서 너 줄 것도 없다!”라며 발끈하셨다. 그때 엄마의 마음을 이제 알겠다. 딸이 내 키를 들먹이면 나도 엄마처럼 발끈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된다. 초등학교 4학년인데 150cm인 걸 보면 날 닮은 게 분명하다. 남들은 딸이 쑥쑥 커서 좋겠다고 하지만 난 딸의 키가 곧 멈출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얼굴에 좁쌀 여드름도 나는 것 같은데 이러다 생리가 시작되면 큰일이다. 여자아이의 경우 생리를 시작한 후 1~2년간 급성장하다가 그 뒤로는 크는 속도가 줄어든다.


친구에게 고민을 말하니 근처 소아청소년과 병원에서 성장판 검사를 해보라고 한다.

“성장판 검사? 그런 거 큰 병원에서만 하는 거 아니야?”

성장판 검사라고 하면 무척 전문적인 검사인 줄 알았는데 X-ray로 손의 사진을 찍고 골연령을 측정해 잔여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골연령을 측정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고 X-ray 촬영을 할 때도 손 이외에 골반, 무릎관절, 발, 발목관절 팔꿈치 관절 등을 측정할 수도 있다) 그다음 날 딸과 함께 바로 병원에 갔다. 검사는 간단했다. 키와 몸무게 측정을 하고 손 X-ray를 찍으면 끝. 엄마 키와 아빠 키 정보도 필요한지 간호사 선생님이 물으셔서 작은 목소리로 알려드렸다.

“엄마 키 158cm, 아빠 키 173cm입니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일주일 뒤.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결과지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지금 나이보다 뼈 연령이 1년 정도 빠르긴 한데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그러고는 나에게 다시 물으신다.

“어머니 키가 몇이라고 하셨죠?”

“네? 158cm인데요?”

왜 또 물으시는 걸까.

“음, 아이의 예상 최종 신장은, 아, 이게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아요. 아이가 잘 먹고 운동하고 잘 자면 이것보다 더 클 수도 있고요. 반대로 하면 더 작을 수도 있어요. 4cm는 더 자랄 수도 덜 자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검사 결과 아이의 예상 최종 신장은 169. 2cm입니다.”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네? 몇이라고요?”

“169. 2cm요.”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팡파르가 울렸다. 아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소리 내 웃었다. 병원에 가기 전엔 그깟 키가 대수인가. 사람은 껍질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했던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의사 선생님께선 활짝 웃는 날 보며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도 더 클 수 있었는데 스트레스나 다른 요인으로 덜 큰 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아까 어머니 키를 다시 여쭤본 거예요.”

“어머, 정말요?”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난 원래 더 클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집에 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리고 집에 와서는 여동생에게, 엄마에게도 전화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지금 내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닌데도 기분이 좋다. 그놈의 키가 뭐라고.


‘성장판 검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글을 검색했다. 성장판 검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정보 글과 검사한 사람의 경험담, 성장판 검사 결과보다 아이의 키를 더 키울 수 있는지 문의하는 글 등 많은 글이 있다. 그 글들을 읽다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을 하면 키가 큰다는 사실 말이다. 일찍 자야 키가 큰다는 사실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에게 공부를 끝내고 잘 것을 권유한다. 키가 크고 싶은 사춘기 아이는 게임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기 싫은 운동이라도 ‘그래, 키 커야지.’하면서 조금이라도 한다.


그날 오후. 학원에 간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아이에게 카톡을 했는데 아이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예상키가 나온 검사 결과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은 거다. 예측 최종 신장 169.2cm에는 빨간 줄이 그어진 채로. 요즘 아이들은 내가 어릴 때보다 더 키에 관심이 많다. 너무 외모에 집착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다가 아이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판 검사 결과지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잘 준비를 하지 않는 딸에게 검사 결과지를 흔들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 생각 나? 일찍 자야 키가 큰다고 하셨잖아. 성장 호르몬이 밤에 나온다고. 이렇게 늦게 자면 예상 키고 뭐고 다 소용없을 것 같은데.”

“아, 맞다. 그러네. 알았어.”

아이는 바로 양치하고 침대에 가서 눕는다. 평소 내 말에는 끄떡도 안 했는데 검사 결과지를 들이대니 고개를 끄덕인다. 과자를 많이 먹으려고 할 때도 운동을 안 하려고 할 때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무기를 하나 장착한 것 같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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