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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을 위한 거친 말하기

아이는 나의, 나는 아이의 욕 파트너

by 수프

말을 예쁘게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예전 남자 친구에게도, 지금의 남편에게도. 특히 지금의 남편은 나와 연애할 때, 말을 그렇게 하는 걸 가르치는 학원이 있냐며 감탄했었다. 아마 삼 남매 중에 둘째로 자라 이런저런 눈치를 보다 보니 둥글려 말하는 습관이 들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유아교육학과를 나와 유치원 교사까지 했으니 내 말투는 더 예뻐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며 ‘이랬어요, 저랬어요.’하고 학부모들에게도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예쁘게 말을 한다는 건 할 말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거르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나의 필요나 욕구보다는 듣는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일이다. 가끔은 속이 문드러지는 일이다.


신혼여행 때, 남편이 물었다. 우리 서로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하자고. 난 딱히 없었는데(지금 물어보면 다섯 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는데!) 남편은 두 가지를 말했다. 화가 나도 자기의 전화는 받아 줬으면 좋겠다는 것, 지금처럼 예쁘게 말하면 좋겠다는 것. 남편은 잊었을지 몰라도 난 그 두 가지 약속을 어떤 상황에서도 꼭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결혼해서 남편과 살다 아이를 낳고 내 아이에게도 예쁘게 말하다가……, 그러다가, 아이가 엄청 날 열 받게 한 어느 날, 참다 참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꺼져!”라고 말했다.



매일 “세상에서 널 제일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지구만큼, 우주만큼, 무한대만큼 사랑해.” 하던 엄마가 “꺼져.”라고 하다니. 나도 아이만큼이나 흠칫 놀랐다. 그런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얼마나 개운하던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딸은 날 힐긋 보더니 “엄마부터 꺼져.”라고 했다. 난 손을 까닥까닥해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낸 후 아이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너나 꺼져.”라고 했다. 아이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서로 꺼지라는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화가 풀렸고 으흐흐 웃음이 났다.

어떤 동화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한바탕 욕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야 온몸에 피가 잘 돈다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방을 상처 주려는 의도에서가 아닌 날 놓아주는 거친 말하기, 가끔은 필요하지 않을까.



올해 11살이 된 딸아이가 가끔 친구들과 통화하는 걸 들어보면 과장을 할 때 앞에 접미사처럼 ‘개’를 붙인다. 개무시, 개 싫어 등과 같이 부정적인 단어뿐만 아니라 개 좋아, 개 잘생겼어 등 긍정적인 단어 앞에도 붙인다. 가끔은 나와 이야기할 때도 그런 말투가 나온다.



어느 날 딸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개’는 좋지 않은 상황 앞에 붙이는 비속어였는데 지금 무분별하게 쓰이는 것이고 네가 가끔 쓰는 ‘존나’라는 말은 ‘아주, 매우’라는 뜻이 아니라 남자 성기인 ‘좆’이 어원인 말이라고.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되도록 쓰지 말자,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옛 속담도 있지 않냐는 훈계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아직은 11살이라 엄마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이제 내 앞에서는 조심해서 이야기하겠지만, 친구들과 만나서도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래서 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아무 때나 그런 말을 하지는 말자, 하지만 정말 화나거나 힘들 때는 내가 너의 욕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 상대방을 누르기 위해서 욕을 하거나 내가 더 세 보이기 위해 욕을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 컨트롤을 위한 거친 말하기를 하자. 다른 사람에게는 안되고 엄마는 너에게, 너는 엄마에게만 하는 걸로. 아무 욕이나 해서도 안 되고 우선은 ‘꺼져’라는 말로 한정 짓는 건 어떠냐. 아이는 엄마의 제안에 낄낄 웃으며 좋다고 동의했다.



그 뒤로 아이의 비속어 사용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딸은 장난으로 나와 “꺼져”를 주고받는다.

“아, 수학 너무 싫어. 수학 꺼져, 꺼져.”

“엄마도 수학 싫었어. 수학 꺼져라. 아하하하. 그런데 네가 엄마보다 수학 훨씬 잘하는 거야. 지금 잘하고 있어.”

“그래? 참, 영어도 꺼져라.”

아이는 꺼졌으면 하는 것들을 나열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난 아이와 함께 화풀이 대화를 하다 마지막엔 노파심에 꼭 이렇게 말한다.

“친구한테는 ‘꺼져’라는 말, 절대 하면 안 돼. 엄마가 집에서 이런 말 한다고 말해도 안 되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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