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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흥만 Apr 02. 2016

그 때도 나는 나였는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 나는 자꾸 자꾸 거짓말이 하고 싶어진다.

광고 열정으로 미쳐갈 무렵 난 또 그 어떤 과정에 원서접수를 마쳤다. 그곳은 다름아닌 한국방송광고공사 주관 광고기획과정에 참여한 것이었다. 아마 인맥도 쌓고, 신입때와 다르게 나른해진 나의 광고열정에 불을 지피고 싶었을 것이리라. 그 때 우리는 마지막 팀별 과제로 북한강 모처에 위치한 수련원에서 가상 제품을 두고 마지막 경쟁PT를 하기로 했다. 한 팀당 4~5명이었다. 우리 팀엔 잘 나가는 외국계 광고대행사 AE(광고기획자)부터 그냥 AE, 나 같이 재능보다는 열심으로 하루하루 근간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카피라이터까지 나름 있을 거 다 있게 짜여진 구성이었다.


프리젠테이션, 이것은 광고기획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종종 나 같은 크리에이터가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프리젠테이션의 일부분일뿐, 전부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같은 주니어 크리에이터에게는 언감생심 프리젠테이션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난 당돌하게도 이번 북한강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이 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첫 번째 이유는 이 강좌의 강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AE인데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그 강사는 엄청 유명한데도 늘 나를 복도에서 마주치면 마치 교장선생님을 만난 학생처럼 “안녕하세요. 한 주 잘 보내셨어요?”라면 겸손하면서도 담담하게 인사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또 잘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셋 째, 난 프리젠테이션까지 잘 하고 싶었다. 내 몸 한 구석에는 분명 연예인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얼마나 멋진가. 대형회의실에 불꺼진 방, 스크린을 가리키며 청중들을 설득해가는 20여분의 설득커뮤니케이션 장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말이다.


한 학기동안 둘째줄에 앉아 강사의 모든 말씀을 정리하고 또 숙지했다. 그리고 팀이 결정되고 난 팀원들에게 말했다. “제가 하면 안될까요?”, 그 잘나가던 외국계 대행사 여자AE 역시 삼대가 우러러 볼 훌륭한 인품을 갖고 계셨다.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회사에서 많이 하니까요. 이번에는 크리에이티브부서에서 일하시는 흥만씨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1개월 후 우리는 팀별 마지막과제를 하러 북한강 모처의 수련원 302호에 집결했다. 드디어 우리조 차례, 내 차례였다. 난 그 외국계AE가 구성한 기획서를 안보고도 말할 정도로 숙지하고 있었다. 처음엔 떨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우리 팀뿐만 아니라 우리반 사람들은 넋을 놓고 내 프리젠테이션을 감상하고 있었다. 스크린을 바라볼 때와, 광고주의 눈을 바라볼 때와 두 걸음 걸을때와, 세 걸음 걸을때를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구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작게 말할때와 크게 말할 때까지 난 거의 완벽했다.


20분 후 박수가 터져나오며 나의 프리젠테이션은 끝났다. 담배피우는 시간에 모두들 우리조가 1등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못이기는 척 북한강 밤하늘을 바라보며 여유있는 척, 상에 관심없는 척을 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우리반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내가 일적으로나 인품적으로 존경하지 마지 않는 그 외국계 여자AE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우리조가 1등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 말에 의하면, “흥만씨의 프리젠테이션의 거의 완벽했어요. 그러나 기획서의 흐름이 특히 32페이지에서 33페이지로 넘어갈 때가 문제였어요. 그 때 논리가 사라졌어요. 우리 동료들은 그 부분을 놓칠 수 있지만, 이 강좌의 담당교수님은 이 부분을 놓칠 분이 아니세요. 흥만씨 탓이 아니라 우리조의 기획력이 부족했어요. 우리는 할 말도 다 못했고, 교수님이 듣고 싶어하는 말도 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녀는 지혜로웠다. 담당교수는 그녀가 한 이야기를 똑같이 총평시간에 하고 있었다. 오늘 난 그 누군가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 분은 아는 사이였지만 다른분들은 모르는 사이였으며 우리는 모두 처음 만난 사이였다. 게다가 소개팅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마치 JTBC뉴스룸에 나온 연예인과 손석희의 대화처럼, 서로 어색해하는 그런 대화말이다. 시간이 흘러 대화는 끝이 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끝났을때처럼, 오늘 대화를 복기했다. 그러다 옛날 그 외국계 광고대행사 AE의 말이 떠올랐다.

난 할 말을 했는가?
또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했는가?

다행히도 오늘밤 대화를 복기하다 난 그 지혜로운 AE보다 더 소중한 질문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난 그 때도 나였는가?


거북스러운 내 역사 앞에서도 솔직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수많은 권위 보다, 그 수많은 내 욕구보다 나와 함께 살아온 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보여준 저녁이었다. 다행히도 오늘밤에도 나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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