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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의바른악당 Nov 28. 2022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11월 11일 존경하는 직속 직장상사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날조차 참으로 상사님스러웠다. 돌아가신 상사님은 뭔가 좀 남달랐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와 임원까지 올라갔으니 이러한 이력 하나만으로도 상사의 남다름을 설명하기 충분했다. 임원진이었던 상사와의 인연은 이직하고 함께한 지 6여개월로 얼마 안되었지만, 슬픔의 깊이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난지 얼마 안된 내가,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펑펑울었던 걸 생각하면 알게모르게 상사와 쌓았던 정이 두터웠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했다. 


처음 직속상사와 면접봤을 때가 생각난다. 이직을 준비하며 나는 커리어를 쌓아온 마케팅이란 업종에 신물이 나있던 터였다. 예산을 거의 쓰지 않는 기업의 마케팅이란 으레 회사의 잡다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이일저일의 것을 맡기 마련이고, 속으로 짜증은 나도 거절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이런식으로 회사의 잡다한 일을 하면 결국 면접장에서 들을 수 있는 뉘앙스는 '물경력'이다. 내 분야와 관련 없는 일이라도 결과를 가져왔으면, 그것이 마케팅이고 넓은 관점에서 브랜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꼭 '이쪽 분야와 관련 없는 일들'에 대한 뉘앙스가 따라 붙는다. 면접장에서 이러한 인식을 깨준 분이 바로 직속 상사였다. 나의 이것저것을 잡일로 치부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입사하고 보니, 상사분도 그렇게 여러가지 일을 하셨고 꿰뚫어보는 눈은 전체를 통섭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독특했던 것이, 상사분은 정말 재주꾼이었다. 사주, 한의학, 인테리어, 커피, 축구, 등산 전혀 연관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두루두루 잘 하셨고, 또 그것들을 잘 연결지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나의 성향과도 잘 맞아 인간적인 매력이 더해졌고,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상사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업무를 주는 방식도 특이했다. 명확한 방식보다 내가 주도적으로 하게끔 내가 진행하는 방식을 믿고 따라주셨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누구는 이러한 방식이 싫을 수 있지만, 간섭받기 싫어하는 나의 성격상 '내가 하는대로'의 업무 방식은 일이 술술 진행되는 느낌이라 좋았다. 일이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인자한 미소로 내가 미션을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모습에서 어른의 그릇을 되새기곤 했다.   


'오늘은 푸짐하게 먹자' 이것이 나와 상사님의 마지막 식사자리였다. 돌아가시고 나니, 같이 먹었던 점심이 생각나서 자꾸 눈물이 흘렀다. 타고난 천성으로 몸은 허약하셨지만, 평소 건강관리를 잘해오시던 상사였기에 갑작스런 죽음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정신없던 장례식이 지나가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의지할만한 상사가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무기력 때문인지 빨리 피로해지는 요즘은 일찍 잠에 든다. 올 한해를 돌아보며 삶이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것조차 상사가 던진 마지막 미션 같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슬픔도 마냥 머무르지 않고, 표면적으로 슬픔을 드러내는 시간을 지나자, 다시 웃고 밥도 잘 먹고 이상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 회사 안에서 누굴 믿고 따라야 하나. 불안과 슬픔이 뒤섞인 물음이 곧바로 뒤따랐다. ‘타인을 등불로 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부처님 말씀에 불현듯 맞닿았다. 덧붙일 말들이 정리되지 않아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문장에서 눈길이 한참을 멈춘다. 나 자신을 의지하라니, 강인한 말 같으면서도 쓸쓸하다... 


11월이 가기 전에는 남기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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