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10월의 어느 주말, 어스름 해질 무렵인 저녁 7시, 우리 부부는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그날은 여의도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어 동네 곳곳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여의도는 아니고 동작구 어디쯤인데, 한강변 아파트가 아닌 구축 아파트지만 나름 불꽃놀이 명당이다. 특히 아파트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제일 작은 평수인 20평대 복도식 아파트에서 불꽃놀이를 멋지게 볼 수 있다. 물론 집안이 아니라 집 밖 복도로 나가야 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오고 딱 2번 불꽃놀이를 봤었는데 바로 작년과 올해다. 그 이전은 코로나 시국으로 불꽃놀이가 열리지 않았다.
불꽃놀이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 경비원 분들께서는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아파트 내부로 들어오는 자동차 차단기 앞에 서서 외부 차량의 진입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작년에 불꽃놀이를 봤기 때문이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한 번 볼까?' 하며 산책을 일찍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와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우리 층 복도 한편에 자리 잡았다.
모든 층에서 사람들이 복도에 나와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저 아래 아파트 밖 불꽃놀이가 보일까 말까 하는 길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노후된 이 아파트 그것도 제일 작은 평수에 전월세에 살고 있음에도 왠지 모를 몹쓸 우월감 따위를 느꼈다.
펑! 펑! 지지직! 슈우욱 펑펑!
불꽃놀이가 시작되었고 이미 잘 보이고 있음에도 욕심을 부려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까 하며 뒤돌아 가던 중 이웃 할머니를 마주했다.(우리 집 옆 옆 옆 집에 사시는 할머니시고, 복도가 꺾어지는 곳이 할머니 집이라 우리 집에서는 그 집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 집이 111호인데 문이 안 열려.." (편의 상 할머니 집을 111호로 가정하겠다)
할머니의 느리고 어눌한 말과 함께 삐삐빅! 도어록 에러 경고음이 이어서 들렸다.
"문이 안 열려..." 할머니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때 마침 뒤돌아 자리를 이동하려던 우리와 마주친 것이다.
할머니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고, 결국엔 비밀번호 오류 횟수를 초과했는지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이후엔 버튼조차 눌리지 않았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몇 분 후에 다시 눌러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할머니, 현관 비밀번호 기억 안 나세요?"
남편이 물었다.
"왜 이러지? 우리 집이 111호가 맞는데 문이 안 열려... 문이 안 열려..." 할머니는 내 남편을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여전히 혀가 꼬인 것과 같은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목소리는 크셨다.
이날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우리 집이 111호가 맞는데... 문이 안 열려...'라는 말을 과장을 조금 보태서 한 50번은 넘게 들은 거 같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현관에 적힌 111호를 보면서 계속 집의 호수를 누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111번을 계속 누르고 계셨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의 할머니 모습은 마치 술에 살짝 취한 사람처럼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거리에서도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오류가 나 잠겨버린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연신 누르는 할머니에게 "지금 누르시면 안 돼요. 조금 있다가 누르셔야 돼요"라고 남편이 말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이상해. 우리 집이 111호가 맞는데 문이 안 열려... 문이 안 열려...'라는 말만 반복했다.
"할머니 휴대폰 어디 있어요? 휴대폰 안 가지고 나오셨어요?" 남편이 물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우리 집이 111호가 맞는데 문이 안 열려... 문이 안 열려..."였다.할머니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오신 거 같았고, 귀가 잘 안들리시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은 참으로 어려웠다.
"나 이 할머니 알아. 지난번에도 집에못 들어가고 계셔서 내가 할머니 휴대폰으로 따님한테 전화해서 비밀번호를 물어보고 열어 드렸어." 남편이 말했다.그리고 할머니는 같이 사시는 분 없이 혼자 사시는 거 같다고.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은 오늘과 같은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집은 엘리베이터 앞이었는데, 운전을 하는 남편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는 서로 다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할머니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할머니 따님이 있으셔?" 내가 물었다.
"모르겠지만, 그때는 휴대폰을 가지고 계셨는데 거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가 딱 한 개였어. 거기에 전화해서 물어봤지" 남편이 대답했다.
딸이 있는데도 이런 할머니를 혼자 사시게 하다니,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딸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따님 전화번호 기억하세요?" 남편이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으응?" 할머니가 잘 못 들으신 거 같아
"따. 님. 전. 화. 번. 호. 딸. 전. 화. 번. 호. 요." 남편이 한 자 한 자 크게 입모양을 벌리며 다시 말했다.
이날은 불꽃놀이 소리와 구경 나온 사람들의 소리로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다.
"나 딸 없어" 손을 양 옆으로 가로저으며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럼 그때 전화받았던 사람은 누구지?" 내가 의아한 듯 남편에게 물었고 남편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이러는 중에도 할머니의 집 앞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 바로 옆복도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우리 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우리 3명만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비밀번호(집 호수)를 눌러댔고, 우리는 어떡하지 하면서 발만 동동거렸다.
내가 "관리실에 가족 연락처가 있지 않을까?관리실에 가서 물어보자"라고 말했고 남편도 "그럴까?"라고 대답했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아주머니 한 분께서 "지금 이 시간에 관리실 문 다 닫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가 다 되었고, 지쳐있던 우리는 그 아주머니 말에 설득되어 관리실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그전에 전화를 먼저 했었는데 통화가 안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경비원 분들은 날이 날인지라 경비 초소에 안 계시고 각자 맡은 구역에서 경비를 서고 계실 거였다.
"경찰에 연락하자"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자 내가 말했다.
할머니에게 잠시 벽에 기대어 쉬고 계시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으나, 우리가 여러 방법을 논의하고 있는 중에도 헐머니는 계속 옆에서 왔다 갔다 현관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대략 난감한 이 상황에서 불확실한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경찰을 부르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겠지 라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한 것 같다.
'경찰을 불러도 되나?'라는 생각에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별다른 수가 없었는지 이내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여기 OOO아파트 OOO동 O층인데요, 할머니 한 분이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셔서 계속 못 들어가시고 계세요" 남편이 휴대폰 넘어 경찰에게 말했다. 전화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였고 그 후 10여분이 지났을까? 경찰 두 분이 도착하셨다. 오늘처럼 불꽃놀이를 하는 날은 더 바쁘셨을 텐데 와준 것에 너무 감사했다.
경찰분들 말씀이 직계가족이 아니면 경찰도 연락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등록된 직계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딸이 없다는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 그럼 남편과 통화했던 그 여자분은 따님이 아니라 돌봐주시는 분인 건가. 알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이 와도 문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나는 그럼 최후의 방법으로 늦은 시간이지만 열쇠공을 불러야 하나 생각했던 찰나(열쇠공이 도어록도 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갑자기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고 문 앞으로 가더니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그동안 눌렀던 세 자리 집 호수가 아니라 네 자리 번호를 누른 것이다. 그 순간 지금까지 요란하게만 울리던 도어록이 경쾌하다 못해 상쾌한 음을 내면서 문이 열렸다.
띠로리~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동시에 "어! 열렸다!"라고 환호했고, 그리고 뒤를 이어 왠지 모를 배신감 같은 게 밀려왔다. 경찰이 도착하고 그분들과 몇 마디 나누지 않은 불과 1~2분도 안된 시간이었다. 바쁜 날에 경찰까지 불렀는데 마치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된 것 마냥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신 것이다.
아니~ 할머니, 이렇게 쉽게 열리는 것인가요?
경찰분들은 할머니에게 몇 가지 질문을한 뒤에 할머니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며 쉬시라고 하였다.
"할머니랑 자주 왕래가 있으신가요?" 경찰 한 분이 물었다.(사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웃과 자주 왕래하고 살까?)
"아니요. 특별히 없습니다. 지나가다가 할머니가 못 들어가고 계셔서요"라고 답했다.
이후에 서로 고생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고 잘 마무리되었다. (그 뒤에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오고 갔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이날 내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답답하면서도 먹먹하고 우울하면서도 두렵고.
할머니에게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가족 없이 혼자 사시는 거라면......
너무 안되었다.
나는 저렇게 혼자 살 수 없을 거 같다.
남편에게 연신 "나는 저렇게는 못 살 거같아..."라고 말했다.
더욱이 남편과 나 둘 뿐이라 둘 중 누구 하나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 온다.하지만 그날이 언젠가는 오고야 말겠지.
그 할머니가 너무 안쓰럽지만, 할머니와 같은 그런 노년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할머니에게 죄송스럽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