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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13. 2023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도서관 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복작복작합니다. 


 꾸역꾸역 저녁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추슬러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갑니다. 저녁을 일찍 먹어서인지, 저녁 설거지가 다 끝났는데도 주변이 환합니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은 참 예쁘네요. 제 마음은 시커먼데 말이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어요. 


 여러 일들이 쌓여 감정적으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더라고요. 그냥 마음 내키는 데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 곳은 없지만 어디로든 걸어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발길 닿는 데로 걸었습니다. 

 

 평소 집순이인 저는 집에만 있습니다. 집 앞에 뭐가 있는지도 인터넷 지도로만 알 뿐이고요. 필요한 병원이나 마트 정도만 왔다갔다 했지, 자세히 둘러보며 찬찬히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날 처음 알았네요. 저희 집 앞에 좋은 곳이 이렇게 많다는 걸요. 예쁜 공원이 있어 운동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다닙니다. 커피숍이 많아서 짝꿍끼리 커피 마시러 가는 사람도 눈에 띕니다.  맛있는 식당이 있어서 가족단위로 화기애애하게 외식하는 사람도 보입니다. 술집도 있네요. 친구들끼리 왁자지껄 술 마시러 갑니다. 저만 우울하게 혼자서 방황하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하게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적 없이 나와서 걷기는 처음이었어요. 운동도 아니고, 가야 할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해서 나왔는데, 주변에는 밝은 웃음의 사람들만 보입니다.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한 저만 더 작아지더라고요. 어딘가에 전화라도 할까 하고 전화목록을 살펴봐도, 전화할 곳이 없습니다. 시시콜콜하게 수다를 떨며 제 마음의 무거움을 살짝 풀어보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도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따라 친구가 이럴 때 있으면 좋은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걸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이없게도 도서관 앞이더라고요. 혼자서 멋있게 술을 먹어볼까 라는 생각으로 걸어 다녔는데, 실상은 도서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야심차게 집에서 나와 혼자만의 작은 일탈을 꿈꿨는데, 현실은 도서관 앞이네요. 갑자기 집을 나왔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인터넷에 물어봤어요. 찾아보니, 다른 분들은 호캉스라고 호텔에 가서 푹 쉬다가 오기도 하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실컷 보기도 하고, 곱창집에 가서 맛있는 혼술도 한다고 하던데. '도서관에 가보세요.'라는 글은 단 한 줄도 없었어요. 제일 많은 답은 '커피숍 가서 맛있는 커피 한잔 하고나면 마음이 진정된답니다.'라는 글이었어요. 도서관 가는 길에 별다방, 콩다방, 온갖 대형 프랜차이점 커피숍과 라떼가 맛있다는 개인 커피숍까지. 들어가서 쉴 수 있는 커피숍들이 정말 많았는데,  한 번도 눈길이 가질 않더라고요. 제 발길은 그냥 처음부터 도서관을 향해 있었나 봅니다.


 커다란 도서관 앞뜰을 보자 마음이 훅~하며 놓였습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급하게 열람실로 달려갑니다.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책장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의 위안을 갖습니다. 평소에는 읽고 싶은 책들을 콕 짚어서 책을 검색하고 찾아 읽었는데, 오늘은 그냥 둘러봅니다. 찬찬히 모든 책장의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오후 8시쯤의 도서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람실도 꽉꽉 차있고, 자료실의 큰 책상까지 다들 앉아 계시더라고요. 책 읽는 분들, 숙제하러 온 학생들, 공부하러 온 사람들. 모두들 자기만의 일에 열중한 채로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한번 더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다가 뭐에 홀린 듯 책 학권을 꺼냅니다. 유독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책이었어요. 책 제목도 하얘서 눈이 침침한 저는 눈을 비비고 다시 제목을 봐야 할 정도로 하얀 책이었습니다. '눈물 한 방울'. 이어령 선생님의 생전 마지막 책이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영면에 드시기 전까지 손수 쓰셨던  마지막 글이었어요.


 가끔 도서관에서 의도치 않게 마주친 책들이 저에게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눈물 한 방울'도 그런 책이었습니다. 눈길이 가서 그냥 꺼내 펼친 책이었을 뿐인데. 첫 문장을 읽자마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서문의 첫 문장이었습니다. 첫 문 장을 읽자마자 눈물샘이 터지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조용히 책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목 놓아 울 수도 없고. 예쁘게 눈물만 나오면 되지, 왜 이렇게 콧물은 많이 나오는지. 항상 눈물보다 콧물이 더 많이 나오는 제가 밉다는 생각이 들자, 콧물이 더 나오더라고요. 급하게 휴지를 찾아 콧물을 추스르고, 서문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제 기분은요. 마음이 너무 힘들어 산책을 하다가, 이어령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뵙고,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치유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책을 좋아하나 봅니다. 책의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라서요. 책과 대화하면서 지혜를 배우고, 위안을 얻어서 말이에요.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 놓고 눈물 콧물 맘껏 흘리며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짐을 하나 둘 덜어냈고요. 앞으로도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도서관을 찾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밖에 갈 곳 없는 저라서 잠깐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저라서 참 어여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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