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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Jun 03. 2020

전 직장에서 알던 사람과 우연히 통화를 했다

블링블링 기억수첩 2P

업무 차 A라는 전화를 걸었는데, 뜻밖에도 이미 내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였다.


A는 4년 전, 첫 직장에서 일하며 알게 된 사람이었다. ‘날 알아볼까?’ 싶어 자기소개를 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연결음이 끝나고 수화기 너머 A가 밝은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내 연락처를 지금까지 삭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기억해주는 게 고마웠다. 솔직히 저장된 이름만 보고선 어떤 사람이었는지 도통 몰랐는데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렴풋이 A의 얼굴이 기억이 났다. 그 통화와 함께 나는 A를 알고 지내던 4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하나, 둘, 셋,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탁!”


슬레이트가 빗나가는 바람에 NG가 났다. 이 간단한 것 하나도 실수를 하다니. 식은땀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이태원의 한 스튜디오, 나는 어느 관찰 예능프로그램의 FD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FD가 아니라 일일FD체험을 하는 기자였다. A는 그 예능프로그램 제작사의 직원이었다.


사실 그때 나는 ‘제물’로서 그 일을 했다. 지금이야 MBC <전지적 참견시점> TV조선 <아내의 맛> SBS <동상이몽> 을 비롯해 리얼 관찰 예능이 너무도 많지만, 당시엔 리얼 관찰프로그램이 별로 없기도 했고 시청률도 자 안나왔다. 상사는 자신의 절친이 프로그램 홍보를 부탁하자 르포기사를 쓰라는 명목으로 그곳으로 나를 파견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상사는 나를 골려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얘가 얼마나 깡이 있는 앤가 보자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든 말든 간에 나는 촬영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 제작진의 한 사람으로서 도울 게 있다는 것에 들떠있었다. 제작진이라는 뱃지를 단 기분이었다.


촬영준비를 돕기 위해 아침 일찍 전달 받은 주소로 갔다. 그날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릴 정도로 더웠다. 촬영은 좁은 골목의 계단을 한참 오르면 나오는 카페를 빌려 진행됐다. 낮인 데도 검은 커튼이 쳐 있어 어두웠다. 어차피 촬영은 자연빛이 아니라 조명으로 빛을 조절해서 하는 거니 커튼을 치는 거라고 했다.


스탭들은 거의 대부분 검정색 옷을 입고서 기계처럼 움직였다. 시계처럼 아귀가 맞게 돌아가는 그들 틈에서 하릴 없이 서 있는 내가 답답했다. 점심 먹을 생각도 안하고 일만 하는 그들에게 차마 점심은 안먹냐고 물을 용기가 안났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기자대접 받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닌데...’


고민 끝에 나는 벌떡 일어나 스탭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작은 거라도 돕고 싶어요.” 내 패기에 응답한 것인지 막내뻘 스탭이 할 일을 지시해준다. 출연자 좌석 앞에 생수를 하나씩 놨다. 소품들을 놓는 것도 도왔다. 이번 촬영 전에 어떤 준비들이 이뤄졌는지도 작가에게 물었다. 최대한 이 프로그램에 내가 관심이 있다는 걸 표현했다.


출연자들은 한참 분장을 마치더니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에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그제야 ‘번쩍’ 하고 조명들이 켜 졌다. 눈이 부셨다. 장비들은 대충 봐도 10개는 됐다. 조명 선을 잘못 밟으면 꺼질 수 있다고 해서 발걸음에 조심하면서 스튜디오를 휘젓고 다녔다.


“오늘 저희 일일 FD에요. 잘 부탁드린다고 박수!”


메인PD가 출연자와 스탭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손에 슬레이트가 쥐어졌다. 연습한 대로만 하자, 속으로 되뇌였다. 그리고 내가 카메라에 섰다.


슬레이트는 연습한대로 딱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배시시 웃었다. 이런 사소한 일 마저도 몇 년 후엔 추억으로 남겠지? 혼자 갖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리고 힘차게 말했다.


“다시 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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