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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Jun 18. 2020

한때는 '상큼발랄'의 대명사였다

블링블링 기억수첩 8P


나도 상큼할 때가 있었다. 너무 상큼해서 문제였다.


20대 초년생 시절, 친구들과 혜화에 있는 스티커 사진 매장을 갔다. 1~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무려 11명이 들어갔다. 아래에 쭈그려앉아 세 명, 중간에 4명, 뒤에 보일락말락 4명. 포즈는 둘째 치고 모든 얼굴이 화면에 담기느냐가 문제였다.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뒷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히고 버티느라 힘들었고, 1열을 맡은 친구는 얼굴이 크게 나오는 걸 감수해야했으며 3열의 친구는 꼿발을 딛고 간당간당하게 서 있었다.


살을 부대끼며 있느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몰랐다. 부스에서 나오니 땀이 흥건했다. 부스에서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우리를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저길 어떻게 다 들어갔나? 싶은 표정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즐기며 우쭐함을 느꼈다. 그 가게 명예의 전당에 오른 기분이었다. 실제로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11명이 한 부스안에 들어간 경우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워줬다.


엄지손가락만한 사진을 한 장씩 오려가졌다. 그 사이에도 우리는 누가 뭘 가진다느니, 내 얼굴은 너무 작게 나왔다느니 재잘댔다. 손바닥에 올려둔 사진 속 내 얼굴은 새끼손톱 만 했다.


이 작은 크기의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부스 안에서 숨막히는 격동의 시간을 보낸 건가. 우정의 증표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북적이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몇 분 전일에 새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만큼 분위기에 취해 흥분해 있었던 것 같다.


가게를 빠져나가다가 나는 불현 듯 몸을 홱 돌았다. 그리고 카운터 직원을 향해 사랑의 총알을 쏘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저희 다음에 오면 서비스~!(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오마이갓!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평소의 나라면 절대, 네버 할 수 없는 멘트였다. 친구들은 오글거렸는지 꺄 소리를 질렀고 나는 부끄러움에 무리에 섞여 서둘러 문을 빠져나왔다. 그만큼 나는 주위 시선에 초연한 편이었고 감정에 솔직했고 배짱과 용기도 있었다.


이후 여러 경험을 하면서 그런 나의 ‘반짝임’은 세월에 빛바래갔다. 감정에 솔직하다는 이유로 ‘당돌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러지 말라고 제지당하기도 했으며 또 누군가에겐 아줌마 같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점점 과거의 말과 행동을 할 용기가 없게 됐고, 나를 향한 시선이나 누군가를 향한 감정에도 무감각해졌다.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옛날이 기억나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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