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희진 말고 김삼순이 좋아!

서른,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기

by 아임유어엠버

맑은 공기, 초록빛 자연, 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까지.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는 나름의 치열하고 고된 일들이 있었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생(生)에 대한 갈림길에서 나에 대해 돌아본 순간이었다.


스물 여섯에서 일곱으로 넘어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탈의실에서 분홍색 가운으로 입고,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응접실 쇼파에 앉아 이름 불리기를 기다리는데, 내 옆으로 젊은 여자 한 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는 옆에서 훌쩍였다. “어떡하니.. 어떡하니..”


젊은 여자는 애써 태연한 듯 말했다. “괜찮을 거야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여자는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진료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보다 해봤자 몇 살 많아보이는 그 여자에게 닥친 슬픔이 마냥 남의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여자 다음으로 내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내 증상을 말했고 의사의 지시대로 침대에 누웠다. 의사가 들어오기 전, 간호사가 내 가운을 벗기고, 몸에 큰 수건 한 장을 덮어줬다. 치료를 위한 준비였지만,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젤이 발린 초음파 기계로 의사는 내 유방을 더듬거리며 검사를 했다. 움찔할 정도로 차가웠다. 누군가 나를 뒤적인다는 기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내 가슴에 용종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는 아주 길지 않았지만, 몇 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하면서 상황을 지켜봐야하는 아이였다. 의사는 용종의 다행히 위치가 안전한 곳에 자리잡아, 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임용 고시 준비 중이었다. 의사는 20대에는 거의 이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불안감에 의사에게 했던 말을 묻고 또 물으셨다. 진료실을 나오니 웃음이 나왔다. ‘오늘부터 덤으로 얻게 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자.’ 나를 달래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 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배우 정일우도 스물 일곱에 믿기지 않는 일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머리에 혹을 달고 산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여러번 오르고, 오늘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단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봤다.


당시의 절박함을 잠시 잊은 채 살아왔다는 생각에 뒤통수가 띵 했다. 내가 사는 하루는 다른 이가 그토록 바라던 하루라는 걸 잊은 채, 허투루 보낸 시간들이 많은 것 같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취미하나 없이, 나를 힐링시키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한 채, 틈을 주지 않고 달려왔다.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법을 모르고 살아온 것 같다.






2005년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서른살 김삼순은 김희진이 되길 원했다.


그녀는 김삼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현진헌을 만났고 현진헌은 김삼순을 김삼순답게 살게끔 만든다. 결국 김삼순은 김희진으로의 개명을 포기하고 김삼순으로서 삶을 살기로 한다. 그시절 김삼순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서른살 청춘의 대명사였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나는 새로운 김삼순이 되었다. 서른이란 나이에 조급함을 느끼고 나를 향한 시선에 괜스레 불쾌해지기도 한다. 나만의 보석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내가 못 가진 타인의 장점을 부러워한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상대의 반응을 먼저 걱정해 망설인다. 나도 모르게 나를 다독이고 참아내며 하기 싫은 것을 꾸역꾸역 한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가끔은 No를 YES라고 말하기도 한다.


“난 희진이보다 삼순이가 좋다”고 말해주는 현진헌은 없지만 나다운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려 나를 꾸며내거나, 다른 사람을 의식해 나를 돌보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말이다.


먼저 내가 누군지 잘 알아야하겠지. 얼마 전 어느 단톡방에서 다음 모임 드레스코드를 정하는 투표를 했는데 후보 중에 ‘올블랙 의상’ ‘하객 패션’ ‘꾸안꾸 스타일’을 포함해 몇 가지가 있었다. 다수결로 올블랙 의상이 선정됐지만 난 꾸안꾸 스타일을 택했다.


또,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고 뜨거운 태양보다는 달이 좋다. 커피보다는 잎을 넣어 끓인 차를 좋아하고 도시 여행보다는 자연 여행을 선호한다. 이런 식으로 체크리스트를 쭉 만들어보니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현재 내 기분은 ‘감사함’에 가깝다. 어찌보면 위선적인 답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 그렇다.


5년 전에 학교 선후배로 알고 지낸 동생과 5년 만에 만났는데, 내게서 직장인의 바이브가 느껴진단다. 과거 나는 열정적이고 발랄했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한 친구는 내게 ‘좋은 이야기 상대’라는 표현을 해줬다. 나와 만나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 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면서. 그 친구를 위해 미니 상담소를 열기로 했다. 나를 찾아주고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새삼 기뻤다.


나의 고민은 50대가 되어도 계속될 것이고 그 시대에도 새로운 김삼순은 탄생할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챙기면서 함께 고민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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