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타러 현장 나온 게 아니잖아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다

by 아임유어엠버

드라마 PD로 일하면서 나홀로 심각하게 고민한 게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 질문을 들게 하는 순간은 커피를 탈 때였다.


현장 스탭들은 커피를 참 좋아했다. 특히 내가 속한 팀의 감독님은 하루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었다. 기분이 별로 일 때면 달달한 것을 찾았다. 매일 제작비로 커피차를 부르면 좋았을테지만 현실은 스틱형 맥X(일명 달달이)조차도 최대한 저렴한 걸로 사야하는 상황이었다.


연출부는 나를 길들여놓기 위해 촬영 초반부터 별다방 커피를 요구했다. 뭣 모르는 나는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줬고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이틀에 한번 꼴로 별다방에 가서 커피를 사다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자기 돈이 아닌, 제작비로 심부름을 해오라는 얘기였다. 각 팀의 오야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관례상 그들에게 제작비로 가끔 커피를 주곤 했는데 어떤 팀은 오야지들끼리 돈을 모아 커피를 사기도 했다.


우리 팀도 그들끼리 일종의 ‘커피계’를 만들어 5만 원씩 모아 내게 줬는데, 일부 파렴치한 분들이 돈을 내지도 않고 커피를 요구해 난감한 적이 많았다. 심지어는 커피계에 속하지 않은 멤버들이 현장에 와서는 커피계 멤버에게 제공하는 커피를 보고선 자기는 왜 안주냐고 떼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도 입맛이 까다로워서 별다방 커피가 아니면 안 마시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현명한 살림과 사회생활(?)을 위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비싼 커피를 1인에 한잔씩 갖다 바칠 수 없었다. 만약 10명에게 커피를 배달해야하는 상황이 되면 8인용 ‘투고백’을 주문한다. 그리곤 일회용 컵을 더 달라고 해서 10잔으로 나눠 따른다.


아예 특정 카페에 돈을 내놓고 스탭들에게 각자 커피를 받아가라고 전체 공지를 내리기도 했고, 카페에서 대용량 보온병을 빌려 알뜰하게 스탭 전체에 커피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고급 원두를 구입한 후 커피 추출기를 활용해 직접 커피를 내리기도 했다.


강원도 정선의 어느 터널에서 촬영을 한 날에는 주위에 카페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뜨거운 물을 탈 수 있는 상황조차 안됐다. 거기에 촬영지인 터널까지 가려면 언덕을 올라야했고 내부로 들어가면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때 내 생활력이 효과를 발휘했다. 글램핑 장을 활용해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고 주전자에 가득 부었다. 20개가량의 종이컵과 커피 믹스 한 움큼을 쟁반위에 올리고는 떡 장수처럼 머리에 이고 터널로 들어갔다. 한 손에는 바글바글 끓는 주전자를 들고서. 종이컵에 믹스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제조한다. 종이컵엔 김이 모락모락 나온다. 쟁반을 들고 다니면서 스탭들에게 나눠주면 성공!


이 일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요령만 늘어가는 나 자신이 가련했다.


커피를 어느 타이밍에 사러 갈지, 사온 커피를 어느 타이밍에 나눠줘야 할 지도 고민거리였다. 늦게 사오면 이제 먹기 싫어졌다고 불평이었고, 일찍 사와도 촬영 분위기 상 커피를 못 나눠주면 식었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PD인가 아니면 카페 직원이나 바리스타인가.


감사하게도 지금은 일을 하며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커피를 대접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커피를 마실 때마다 한 잔에 담긴 많은 이들의 노고가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지금도 커피를 타거나 배달하고 있을 무수한 드라마PD들을 위해 치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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