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한복판에 낙오됐다
생존이 달린 문제, 이를 악물어야 했지!
<1박2일>에서 '낙오'는 '복불복', '입수'와 함께 예능 적응훈련으로 손꼽히는 장치였다.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등 아예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낙오된 상황을 '낙원'처럼 즐기면서 제작진을 허탈하게 만드는 선택지가 있다. 그런데 후자를 택하는 경우는 왠만한 내공이 없고서야 불가능하다.
실제로 낙오됐을 때, 나는 이게 예능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곱씹으면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이, 이것 좀 차에 싣으면 안될까요? 이따가 쓰레기통 보이면 바로 버릴게요”
“안된데도 글쎄!”
쓰레기가 든 상자 하나를 두고 기장님과 실랑이를 벌였다. 여기에서 ‘기장님’은 촬영에 필요한 짐들을 싣고 다니는 스타렉스 운전기사를 말한다. 나는 드라마 PD를 했을 때 늘 스탭버스가 아닌, 기장님의 스타렉스를 타고 다녔다.
우리 기장님은 동네 정육점에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젊었을 때 운동을 했을 것처럼 덩치도 있는, 듬직한 경상도 사나이! 겉으론 무뚝뚝해보여도 내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쓱 다가와 군것질거리를 내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그런 그도 화가 나면 야수로 변했다. 촬영 중 나온 쓰레기들을 버릴 데가 없어 기장님의 봉고에 싣어야 하는데 기장님은 차 안에 냄새가 난다고 안 된다고 했다. 사실 기장님의 입장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자기 차에 쓰레기를 싣는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원래 쓰레기 상자는 PD인 내가 처리하는 게 아니다. 연출부 FD가 현장에서 잘 버리거나 만약 그럴 상황이 못 되면 스탭버스 짐칸에 싣고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연출부가 뒷정리를 하지 않고 스탭버스를 타고 쌩하니 먼저 가버린 바람에 현장에 가장 늦게 까지 남아 일하던 내가 그걸 차에 싣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장님을 설득하면서도 그의 눈치가 보였다. 기장님은 예전에도 드라마팀에서 일을 하다 어떤 사람한테 된통 당해 다시는 드라마팀에서 일을 안 한다고 했다. 이번에 드라마팀에서 일하게 되어 걱정이 좀 된다고 나랑 처음 본 날 얘기했었다.
그걸 알기에 그의 신경을 거스를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동안 기장님과 쌓아온 신뢰가 무너질까봐 걱정됐다.
쩔쩔매고 있는 날 보고 조감독 A가 다가왔다.
A는 조감독들 중에서도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다 만들어놓은 판을 망치진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다를까. A는 상황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기장이란 사람이 짐을 싣기 싫다는 게 어딨어?”
그는 트렁크에 쓰레기 상자를 우겨넣고 문을 쾅 닫았다. 앞좌석 백미러로 그 행동을 본 기장님이 후다닥 뛰어 다가왔다. 이에 남자들의 거친 대화가 오고갔다.
어쩌면 그렇게 다신 안볼 사이처럼 혀를 놀릴 수 있단 말인가! 30대인 조감독은 나이 많은 기장님에게 말을 놓고는 버럭 욕을 하기까지 했다. 기장님은 기장님대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단단히 화가 났다.
입장이 난감해진 건 중간에 있던 나였다.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 사이에 낀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둘 다 흥분을 한 상태라 끼어들어 말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전쟁은 절정에 이르렀고, 마침내 기장님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 내 트렁크에 있는 짐들도 다 빼”
OMG! 그 말만은 나오면 안됐다. 그럼에도 조감독은 기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기장님에게 말했다. “빼라면 못뺄 줄 알아?!”
그렇게 나는 차에서 내쫓겼다. 트렁크에 있던 짐들과 함께 그야말로 강화도의 도로 한복판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기장님이 모는 스타렉스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전력질주로 떠났다. 차의 뒷모습이 괘씸하다고, 한번 당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쪽으로는 2차선 도로가, 다른 한쪽으로는 절벽이 있었다. 절벽 너머로는 강이었다. 강가에 그날 촬영장소로 썼던 건물이 보였다. 회색 콘크리트 뼈대만 남아있는, 창문도 없이 사방이 뻥 뚫린 공사판 건물이었다.
차가 달리는 현장음만이 귀에 윙윙 맴돌았다. <1박2일>에서 낙오되는 기분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엄마한테 속옷차림으로 집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이처럼 허망하진 않을 것이다.
그날 스탭버스는 나를 태우러 가던 길을 돌아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스탭들의 불편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다들 내가 기장님과 싸운 줄로 착각했는지 소곤대는 소리가 머리 뒤로 들렸다. 잘못한 것 하나 없었지만 집까지 오는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게 기장님과의 이별이었다. 기장님을 그 이후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모든 게 서툴던 시절, 나는 내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보다 한 사람에게 또 한번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죄책감 때문에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