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교통사고가 났다

산 넘어 산이다

by 아임유어엠버

핫팩 없이는 못 버티는 한 겨울에 차량추격씬을 촬영한 적이 있다. 한밤 중이었고, 많은 차들이 동원됐다.


한번 카메라가 돌 때마다 소품차량 뒤에는 촬영장비와 감독님들이 탄 렉카와 보조차량들이 뒤따랐다. 자칫 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스탭들도 긴장했다.


새벽 두시인가 세시였나. 촬영이 거의 마무리 되고 먼저 떠나도 되는 사람들은 반쯤 감긴 눈으로 스탭버스에 올랐다. 우리 팀 연출부A팀도 FD 2명 정도를 남기고 먼저 퇴근했다. 나는 그들을 배웅한 후 현장을 지켰다. 소품차들 상태를 확인하고 그 차들을 몰고 온 기장님들에게 사인을 해드리기 위해 끝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지금 찍고 있는 가벼운 씬 하나만 끝나면 퇴근이다! 기분 좋게 짐을 정리하고 있는 찰나,


“끼익— 퍼억!”


의문의 괴음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후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자는 렉카에 타계신 감독님이었다. 평소엔 잘 전화 안하시는 분이었다. 환자가 없다고 좋아하면 꼭 환자들이 떼로 몰린다는 ‘응급실의 저주’가 촬영장에도 일어난 것일까.


“잘 들어요. 지금 사고가 났어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감독님의 전화 내용을 받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잠시도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옆에서 함께 노닥거리던 FD들에게 긴급상황이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차에 올랐다. 좀 전에 스탭버스를 타고 떠났던 조감독에게 전화를 해 사고가 났음을 전했다. 현장까지 가는 몇분 안 되는 시간동안 손이 파르르 떨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본, 피 흘리는 처참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벼운 접촉사고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내가 대형사고를 마주하다니!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차량 앞 범퍼가 완전히 박살나 있고 그 잔해가 도로 위에 퍼져있었다. 또 다른 차는 뒤가 찌그러져 있었다. 소품용 차를 몰던 무술팀 연기자가 잠시 한눈을 팔아 차가 미끄러지면서 앞서 가던 소품용 차량과 도로변에 세워져있던 다른 차들을 박은 거였다.


다행히 사람이 죽거나 하진 않았다. 소품용 차량에 타 있던 연기자가 목을 살짝 삔 정도였다.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 잘 걷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양호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를 모른다는 거였다. 가장 먼저 사고를 입은 사람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려했는데, 선배 PD가 전화와서는 보험처리를 해야하니 가해자랑 피해자 신상을 알아두란다. 보험사에 연락해 사고 정황과 차량 번호 등을 알리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 와중에 상황을 궁금해 하는 윗분들에게 전화는 계속 걸려오지, 피해자와 가해자들은 서로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지, 스탭들은 다들 나만 보고 있지...뭘 먼저 해야 하나. 정신이 없었다. 휴대폰을 쥔 손가락 추위에 꽁꽁 얼어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카톡이고 전화고 손이 움직이지 않아 못할 판이었다.


아, 이럴 때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이 뿅 하고 나타나 시간을 잠시 멈춰주면 안되나.


그때 알았다. 사람이 너무나 기막힌 상황에 처했을 때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한 다는 것을.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장면에도 잡히는 대로 일은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지나가리라는 것을.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보험 처리를 하고, 촬영된 증거 영상을 바탕으로 사고 경위서를 작성해 회사에 제출하고, 묵묵히 다음 촬영 준비를 했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기계처럼 표정없이 힘든 시간들을 버텨냈다. 지나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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