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별꽃 Mar 01. 2021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안의 편견 돌아보기

편견에 휩싸여 미처 알지 못한 것들이 있다.


남친여친 아니고 애인

 

술자리에서 여자인 회사 동료가 짝사랑에 실패한 이야기를 꺼냈다. 고백을 했다가 두 번을 차였는데도 아직 친구로 지낸다고 했다. 동료가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심지어 생일날 집에 초대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며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위로를 해준답시고 한마디 보탰다. “그 남자 뭐야~!”?


그런데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남자 아니야. 여자야.”


내가 술 기운에 잘못 들었나? “아... 너 방금 진심으로 한 말이지?”


아차! 싶었다. 그동안 동료가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왜 잘 안했는지 이해가 됐다. 혹시 상처를 줄까 싶어 놀란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경우를 첫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주위에서 봤기에 다행이었다.


 ‘남자’가 아닌 ‘그 사람’이나 ‘애인’이라는 표현을 쓸 걸. 무의식 중 뱉은 말에 고정관념이 숨겨져 있었구나 싶었다.


공감=이유를 물어보는 것


정혜신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공감에 관한 어느 강연에서 그녀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의 아픔에 ‘힘들겠다’고 말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게 공감이 아니에요. 공감은 ‘왜’냐고 이유를 묻는 거에요”


이해 안가는 상대의 행동에 대해 이유를 물음으로써 상대의 의중과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쳤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바로 어제만 해도 운전에 어려움을 느끼는 친구에게 “실패 경험이 쌓이다보니 자신감을 잃어 그런 것”이라며 분석하듯 말했는데 이건 제대로 된 공감이 아니었던 거다. 왜 실수가 계속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친구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려 했어야 했다.


나 역시 제대로 된 공감을 얻지 못해 오히려 더욱 갑갑해지고 화가 난 적이 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묻지 않고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속마음을 꺼내보이기 싫다. “그런 건 ~~ 하면 되지 않아?”라면서 가볍게 치부하거나 A라고 말하는데 B로 알아들으면 설명을 하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기자는 ‘왜’라고 물어보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전하는 일이구나 싶어 소중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알고 기사를 써야겠다.


오랜 세월이 깊은 우정은 아냐

 

친구모임에서 한 명이 고민을 내비쳤다. 10년이 넘도록 관계를 유지해온 절친들의 어떤 행동과 말에서 서운함을 느꼈다며, 그 사건 이후로 연락을 하게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가 노년이 되어서도 서로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시간이 꼭 능사는 아닌가보다. ‘나’를 알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른 친구 한 명이 우리가 옛 친구와 점점 소원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매일 만나는 사람과, 하는 일이 각기 다르기에 친구와의 관계도 과거와 같을 순 없다. 우리는 공통관심사를 찾기 위해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추억을 꺼낸다.  


오래 알았다고 해서 친한 친구가 아니라, 현재 내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친구가 친한 친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실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2월 21일/1.18km 10분 달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