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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늑대 Mar 30. 2017

답은 언제나 책상이 아닌 현장에 있는 법이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게 일관적이지 않고, 어떤 일관적인 사상을 초지일관 유지한다는 것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건 사상가들의 몫이지 필자같은 사람들은 그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헌데 가끔 모종의 판단을 해야할 때 "내가 만일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어떤 사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일까?" 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강의실에서 필자는 핸드폰의 사용을 가능한한 금하는 걸로 하고 있다. 물론 정말 눈치보면서 급하게 카톡이나 문자를 하는 경우는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놓고 통화를 한다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카톡에 매달리고 있는 경우에는 주의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조금 더 제약을 두고 있는데, 쉬는 시간이라도 게임은 절대 못하게 한다. "선생님 그건 좀 너무합니다. 쉬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쉬는시간에 뭐를 하더라도 그거까지 제약하는 건 인권침해의 여지까지 있는 건 아닌가요?"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인권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서 그런 조치를 취하는 건 아니다. 사람의 두뇌는 쉬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 8시간의 수업은 정말 사람으로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거다. 해서 필자는 수업시간 동안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서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어차피 하루 8시간 공부는 해야하고, 하루에 쓸 수 있는 집중력과 기력은 분명 정해져 있다. 쉬는 시간에는 확실하게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이틀까지는 모르겠지만 몇달의 수업을 버티어 낼 수 없다.

만일 여러분들이 군대에서 하루 8시간동안 계속 며칠동안 걸쳐서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행군훈련을 하고 있다고 셈 치자. 50분을 걸으면 10분을 쉬는 형태로 계속해서 행군을 해 나가고 있는데, 그 쉬어야 하는 10분의 시간 동안 레크레이션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그냥 푹 몸과 마음을 쉬는것이 바람직할까? 당연히 후자 아닌가? 하루 하고 말 훈련이 아니라면 말이다.

경험적으로 보면 하루에 8시간의 수업이 연속되는 교실 안에서 컴을 가지고 노는 건 좋을 일은 거의 없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은 없고 부정적인 일만 많다. 

만일 여자친구와 싸운 다음에 지금 카톡 하나를 쓰느냐 못 쓰느냐에 따라서 "정말로 놓치고 싶지 않은 여친과 잘 지내느냐 아니면 헤어지게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경우" 라면 선생님에게 얘기하라고 한다 ㅎㅎ 그정도는 봐 준다고... 왜냐하면 카톡하느라고 놓치는게 연애에 실패해서 놓치는 것 보다 훨씬 적을테니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수업시간에 카톡하고 문자하고 심지어는 게임하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게임은 백해 무익한게... 게임에 집중하는 머리로 프로그래밍이나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하는 건 불가능하더라. 게임과 프로그래밍은 상극 같은 존재라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쪽과 병행하기는 쉽지 않더라.

최근 신문기사에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통화나 문자를 하는 것을 인권차원에서 허용해야 한다" 라는 주장을 어느 신문기사에서 보았는데.... 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인권에 대해서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을른지는 모르겠지만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경험은 분명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ㅎㅎ 

좌파적인 이념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판단하기에 저런 무리수를 두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아마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본 사람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소설이  그렇게 사람들로 부터 회자되었다는 건 그 소설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필자도 살짝 그런 시절의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다녔었다.

하나 예를 들어보면 ..... 중고등학교때 빵집에서 여학생들과 미팅을 해도 정학을 당했었다. ㅎㅎ 상상이 가나? 그 정도로 억압당하던 시절이다. 더 심한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핑크플로이드의 카세트 테이프가 가방 일제 검사에서 나와서 정학을 먹던 시절이다. 당시는 무작위로 불시에 가방속에 들어있는 걸 다 털어서 검사하는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야한책이라도 나오면 당장에 정학먹거나 학부모 호출이 이루어지고... 카세트테이프에 방송규제곡이라도 들어 있으면 정학먹었었다. 

헌데 문제는.... 이런 시절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그게 당연한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거다. 해서 야한책을 들킨 아이들은 집에가면 부모님께도 호되게 야단을 맞는게 당연하던 시절이다. 프라이버시? 그런 개념 자체가 희박하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서운 시절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을 억압당하면서도 그것이 억압당하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때려 잡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라니 말이다... 해서 그 시절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 곳곳의 고위층에 있으면서, 당연하게 다양한 양심과 경험에 의거한 자유로운 행동과 생각을 탄압하고 있다. 사실 그것이 파시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에서 아무런 죄책감없이 파시즘 적인 결정을 내리고 제도를 만들고 있는 사회다.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행동에 깊게 스며들어 있는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한채 파시즘 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으니깐...


아마도 그런 험악한 시절을 살았고 아직도 그런 생각에 젖어있는 교육계의 고위층들의 생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저런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마치 고농도의 염산을 희석시키기 위해 고농도의 양잿물을 퍼붓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래서 사회가 좌측이든 우측이든 극단으로 흐르는 건 막아야 한다. 한 쪽으로 극단으로 흐르게 되면 그것을 희석시키는 단계에서 또 다른 극단을 필요로 하게 된다.

마치 이건 극우파 히틀러에 맞서기 위해 극좌파 스탈린이 필요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사실 독재자를 중심으로 단결되어진 체제를 부수어 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독재자를 필요로 한다. 이건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다. 

사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쟁기간동안에 펼친 정책들은 상당부분 독재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서 권력에서 합법적으로 물러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일 전쟁이 계속되어서 전 세계가 "이길 때 까지는 어쩔수 없다" 라는 논리 속에서 독재를 용인하는 시스템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고...

헌데 사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해서 한번 극단으로 흐른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더 길고 힘든 시절을 견디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도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극단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에 기반을 둔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필자의 경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 헌데 책상 위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말이 안통하고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은 현장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얘기가 상당히 잘 통하고 쉽게 의견의 일치에 이르게 되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서 우파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현장경험이 많은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 경쟁이라는 것이 때로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경쟁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준다고 해서 딱히 그거 때문에 공부를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합의할 수 있게 된다.

공부에는 타고난 소질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경쟁의식을 부추긴다고 해서 그 소질을 넘어서기는 어렵고,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자존감이라는 것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에 쉽게 의견일치를 본 경험이 필자는 있다.

또한 인권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올바로 세워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 교실 안에서의 학습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인권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도 쉽게 합의가 되는 문제더라

그리고 실제로 좌파이든 우파이든 간에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없애고 있고, 이 아이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는 것에서 부터 교육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이야기 해 보면 거의 이견이 없다. 그 다음에 방법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현상을 보는 눈에 있어서는 타협과 대화가 안될 정도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더라...

헌데 책상위에서 책안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끼리는 거의 타협이 안되더라. 마치 이건 같은 성경책을 읽지만 실제로 목회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좌파신학자와 우파신학자가 의견의 합치를 보기 어려운것과 유사하다고 할 정도이다.

외국의 경우.... 이론가들은 거의 현장의 경험과 상황에 근거를 두고서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도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마냥 이론만 가지고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상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나아가 세상을 움직인 사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헌데 우리나라는 현장에는 관심도 없고 가방끈만 늘린 사람들이 이론도 만들고 세상을 휘두르는 경향이 상당히 많다. 흔히 얘기하는 폴리페셔들이 향하고 있는 바도 그러하다. 사실 그런 현장경험없이 이론만 내세우는 대학교수보다는 현장에서 10년 20년 경험을 쌓으면서 어떻게 더 좋은 교실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이 더 좋은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해답은 현장에 있다.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제대로 된 문제파악도 어렵고, 설득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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