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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쟁 Sep 06. 2019

낯선 사람들의 설문 조사

멀티탭과 기프티콘



설문 조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객관식보다 주관식을 선호하며, 기타란을 꽉 채워 적는 습성이 있다. 여론 조사도 좋아해서 웬만하면 끝까지 버튼을 누른다. 이건 강박은 아니고 재미있어서 하는 거다. 그리고 의견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타겟으로서 생각을 잘 전하고 싶어서. 조사계의 박찬호랄까...






멀티탭과 낯선 사람1

여유롭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7월의 어느 날.


─ 딩-동, 딩동딩동 디잉-동


이 리듬은 단 한 명만 구사하는 박자다. 저 멀리 프랑스에 있는 녀석. 말없이 한국에 왔나 싶어 얼른 문을 열어 보았다. 보통 도를 아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초인종을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누르진 않는다. 한 번 누르고 답이 없으면 한 번 정도 더 눌러보고 잠깐 기다렸다가 그냥 간다. 낮에 주로 집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가끔 벨이 울려도 잠시 '얼음!' 하고 있으면 냉정하게 말을 끊지 않고도 그분들을 보낼 수 있다. 근데 그땐 뭔가 계셔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문을 열었다. 그곳 나만큼이나 의아한 표정을 한 아주머님이 서 있었다.


"어른 계세요?"


어른이란 무엇일까? 만 20세 이상의 성년을 말하는 것일까,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聖人)을 말하는 것일까. 보통 말하는 어른이겠거니, 생각이 좀 느리게 들었다. 보통의 어른이 된 지도 한참이 됐건만,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매번 당황한다. 눈알을 좌우로 한 번씩 돌렸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에는 해당이 되고, 우리집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그때 없었다. 대충 빨리 대답한다는 게, 


"제가 어른인데요..."

"어머."


맨 눈썹 때문이었을 것이다화장을 하면서 눈썹을 그릴 참이었다. 나는 눈썹이 반토막이라 화장을 할 때 눈썹은 꼭 그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설명을 덧붙일까, 아니 그건 TTMI지, 고민하는 차에 아주머님 목에 건 신분증을 다급히 내미셨다. 구청에서 나왔는데 간단한 체크만 하면 된다며. 그러고는 멀티탭을 슬쩍 내밀어 보이셨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이 괜히 반짝여 보이고 그랬다. 살면서 경품깨나 받아봤는데 사탕이나 행주 말고 멀티탭은 처음이었다. 신-선. 개별 스위치도 있는 2구짜리 멀티탭은 꽤 흡족했다. 문이 크게 열렸다.


"근데 제가 10분 내에 나가야 해서요."


응대하기 싫어서 돌리는 말로 들으신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 아니니 문을 닫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손짓이 이어졌다. 10분이면 충-분하다며.


알고 보니 에코 마일리지 사업의 컨설팅이었다. 집안에서 전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상황을 점검하고 거기에 맞게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방안을 알려주는 것. 우리집은 난방비는 좀 나오긴 해도 전기료는 적게 나오는 편이다. 정확한 에너지 사용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지서를 방에서 꺼내왔다. 그사이 또 다른 아주머님이 응답 없는 옆집을 뒤로 하고 등장하셨다. 아주머님들의 마주보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두 분은 내게 허락을 먼저 구하신 뒤, 냉장고와 공기청정기 앞에서 웃는 표정으로 서로를 찍어주셨다. 2인 1조의 팀구성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냉장고 상단에 에너지소비효율등급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포즈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공기청정기가 잘 나오게 하려고 상체를 숙이는 포즈도. 그런 거 우리 엄마도 잘 하는데-


넉넉했던 10분 중 6분이 흘렀다. 생각보다 답할 문항이 많았다. 설문 조사를 즐기는 나지만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초조해졌다. 내 눈썹은 그때까지도 민둥민둥한 상태였다. 눈알이 아이브로우 펜슬 끝과 볼펜 끝을 왔다갔다 했다. 등 뒤에 거울이 있고, 남은 시간 동안 눈썹을 그리면 늦지 않게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거는 아주머님을 등져야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너무 건방진 비주얼. 아주머님께서 말로 물어봐주시는 덕에 나는 설문지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차마, 거울로 시선을 옮기지는 못했다. 내 갈등의 기운을 감지한 베테랑 아주머님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은 하루에 몇 시간 사용하세요?"

"요즘은 서너 시간 정도요...?"

"TV는요?"

"음.. 한두 시간......?"

"공기청정기는요?"

"어..."

"세 시간~ 전자레인지 한 시간, 밥솥은요? 이 전기밥솥이 전기를 많이 먹어요. 밥 다 하고 보온으로 해두지 말고 퍼서 냉동실에 넣었다가 먹을 때 데워 먹으면 좋아요. 밥맛도 압력밥솥으로 한 게 더 맛있어~"


비와이급 래핑으로 모든 전기제품을 체크하고 압력밥솥 디스까지. 여기가 바로 쇼미더머니!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신 두 아주머님은 약속한 시간 10분에 딱 맞춰 일을 끝내고 멋지게 떠나셨다. 






기프티콘과 낯선 사람2

유난히 피곤했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얼굴의 모든 세포가 파업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역 안으로 칙칙하게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 앞에 한 학생이 나타났다. 검은색의 또렷한 아이라인과 빠알간 틴트 바른 입술이 한눈에 확 들어왔다. 20대 화장이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공모전 준비 때문에 취재를 하러 나왔는데 잠깐만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아... (절레절레)"

"웹드라마 기획을 하는데 너무 막막해서요. '연애플레이리스트' 혹시 보셨어요?"


그냥 지나가려는데 내 귀를 사로잡는 단어가 있었다. 웹드라마라니. 그런 명칭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런 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용썼던 시절이 팟- 떠올랐다. 인터뷰 하는 아가의 발로 뛰며 취재하는 열정도 좋아 보이고, 공모전의 '공'도 몰랐던 때의 막막함을 아니까 대답이나 몇 개 해주자 싶었다. 멀리서 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쭈뼛대고 있었다. 혼자 용기 낸 아이가 기특해 보였다. 짙은 아이라인이 까르르 좋아했다.


"국제인디다큐페스티벌에 웹드라마를 찍어서 내려고 하는데 에피소드를 뭘로 해야할지 몰라서요."


음? 다큐는 논픽션인데 웹드라마를 낸다고? 영화도 아니고 시리즈물인 드라마를...? 1학년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정 믿고 뛰어드는 건가 싶었다. 그래, 내가 못 했어도 누군가는 가능할 수도 있지. 꼰대임을 티내지 말자 맘 먹었다. 요즘은 장르를 파괴하기도 하고 큰 행사일수록 다양한 작품을 초청하기도 하니까. 받으니까 내겠지.


"저희가 잘된 작품을 분석해서 20대 청춘의 고민이나 사랑 이런 걸 다뤄보려고 해요. 몇 가지 질문만 간단히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연애플레이리스트'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뭐- 샬라샬라... 샬라샬라라..."

"우와! 이거 어떻게 다 적지? 내용이 너무 좋아요. 혹시 이쪽 전공이세요?"

"네. 방송영상학과 졸업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학교 후배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 내심 기대를 했다. 전공이 티가 난 게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내 전공을 사랑한다.


"근데 제가 도움이 될까 모르겠어요. 일반적인 사례들은 아닌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만들려면 더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셔야 할 거예요."


진심이었다. 난 보통의 직장인도 아니고 작품 취향도 메이저는 아니니까. 아이는 주변에 도움 받을 데도 없고 취재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잘 아는 바, 슬슬 난 오지랖을 떨기 시작했다. 아이는 신났다.


"지금 대학생이시죠?"

"아... 아닌데요... 30대예요."


내 차림새가 그제야 생각났다. 20대 화장은 아니었지만 뭘 바르긴 발랐고, 운동화에 백팩에 묶은 머리. 아이는 적잖이 당황하며 급히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30대도 청춘이라고 했던가.


"그럼 질문을 사랑과 고민쪽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혹시 혼자 자취하세요?"

"아뇨. 둘이 살아요."

"아~ 친구랑요?"

"남편이랑요."

"악!! 결혼하셨어요?!"

"네."


작정한 건 아닌데 자꾸 당황시켜서 은근히 미안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나를 모르고 나는 아이가 뭘 물어볼지 모르니까. 연신 휴대폰에 적힌 내용을 체크하며 아이는 다음 질문을 살폈다. 아이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뭐, 과거를 풀어달라면 얘기해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주제와 관련해서는 적합한 취재 대상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나중에 더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주고 집에 왔다.


며칠 뒤,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면서 카톡이 왔다. 아이는 만나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냐고도 물어왔다. 자기가 직장 앞으로 찾아오겠다고. 난 일하는 시간도 직장 위치도 고정돼 있지 않으니 서울 지역이면 어디든 만날 수 있다며 파격적인 인터뷰이의 자세를 선보여 주었다. 대신 질문지를 정리해서 먼저 보내달라고 했다. 아이는 두어 시간 뒤에 9개쯤 되는 질문을 보내줬다.


몇 번 약속이 어긋났고 미안했는지 아이는 내게 2000원짜리 편의점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알바비 들어오면 밥을 사주겠다며.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해준 게 뭐 있다고 학생한테 뭐 이런 걸 받나 싶어서 밥은 공모전 당선되면 사주라고 하고 거절을 했다. 아이는 언니 감사, 천사를 연발했고, 약속을 다시 잡았다. 자기네들은 주로 천호역에서 만난댄다. 근데 그날도 자기가 알바 때문에 시간이 안 돼서 다른 '임원진' 분이 대신 나가주기로 했다고 했다.


찜찜한 기운이 (그제야) 강력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임원진'......? 난 말하는 사람의 단어나 뉘앙스를 주의 깊게 듣고 생각하는 편이다. 학생회이거나 동아리라고 해도 임원진이라는 단어를 쓰나....? 혹시나 싶어서 그쪽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물었다. 나의 불손한 마음을 탓하며.


"천호역에 혹시 도를 아십니까 많아?"

"어, 엄청."


그쪽에 그쪽 사람들의 사무실이 많다는 것이다. 아뿔싸. 뒤늦게 나는 그 아이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사실, 그 아이에 관해서는 카톡에 뜬 이름과 얼굴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속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도 딱히 구체적인 신상정보를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는 내게 너무나 추상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카톡으로 적절한 유도심문을 해보기로 했다. 혹시나 상처받지 않게.


─ 공모전 어디에 낸다고 했었죠? 동아리에서 하는 거라고 했었나요?

─ 과 친구들끼리 미리 준비하는 교내 공모전이에요!


음...? '국제인디다큐페스티벌'이라더니, 교내 공모전? 그래, 뭐 준비단계에서는 공모전을 바꿀 수도 있지. 이해되는 부분. 그러면서 아이는 자기 이름이 적힌 웬 포스터를 하나 보내왔다. 모 대학 연기예술학과에서 올린 연극포스터였다. 아이의 이름 '이**'이 맨 위에 써 있었다. 마침 아는 분이 졸업한 과라 여차하면 실제 재학 중인 후배인지 확인해 볼 수도 있어서 쓸데없이 안도를 했다. 근데 뭔가 계속 쎄한 거다. 어느 쪽으로든 확신을 하고 싶었다.


─ 포스터에 나온 애들 전부는 아니고 몇 명이서 해요.


아이는 내 미심쩍은 마음을 눈치챈 건지 묻지 않은 정보도 말해줬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임원진'이라는 단어였다. 그래서 모 대학교 학생 '이**'을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엔 없었고 페이스북을 들어가봤다. 거기서도 개인 계정은 못 찾았다. 그래서 모 대학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연기예술전공이면 분명 활발한 활동이 요구될 것이고 반드시 모두가 페이지에 가입을 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유명한 과라 포스터를 금방 찾았다. 그리고 곧, 내 틀린그림찾기 실력이 발휘되고 말았다. 모 대학에서 올려놓은 포스터엔 이**이 아니라 김**의 이름만 있었다. 딱 그 이름만 다르고 나머진 다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나에게 카톡으로 보낸 포스터 사진은 좀 깨져 있었다. 조작된 것이다.


확신의 결정타가 필요했다. 하필 이 시점에 성을 바꿔야만 했던 슬픈 가정사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연기 연습을 한 걸 수도 있었다. 실제로 대학로에서 대중 공포를 없애려고 인터뷰 시도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설마 그들도...) 그래서 이젠 다시 '모 대학 연기예술전공자 김**의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얼굴을 확인하면 끝나는 거였다. 인스타그램에서 김**도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답을 찾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 대학 연기예술학과를 해시태그로 찾으니 연극이 끝난 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한 것들이 발견됐다. 그렇게 태그와 링크를 타고 타고 타고 타서 모 대학 연기예술전공 김**을 찾았다. 다른 얼굴이 나왔다. 아, 내 미친 잉여력에 박수.


이**은 김**을 사칭했다.


짙은 아이라인의 아이는 포토샵으로 다른 이름들과 같은 폰트로 그럴싸하게 자기 이름을 넣고, 나를 작정하고 속일 생각이었던 거다. 배신감. 보이스피싱을 이렇게 당하는 건가 싶었다. 가만 돌이켜 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닌데 왜 처음부터 알지 못했을까. 다큐페스티벌에 드라마가 웬 말이며,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만나서 인터뷰를 하나. 이**이 본명은 맞나?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을까, 전도를 할 생각이었을까. 나 같은 사람을 연결하는 게 그 아이의 알바였을까.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 팀원들과 얘기해보니 언니한테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이 모아졌어요!


이건 결국,


─ =개중에 네가 가장 호갱이었어!


부들부들부들. 그 와중에 고작 2000원짜리 기프티콘을 주고 사기를 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더 나를 열받게 했다. 즉시 복수의 시나리오를 여러 개 짜기 시작했다. 사칭으로 신고를 할까 또라이짓으로 역 사기를 쳐볼까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좀 알아보니 웹툰이나 UCC를 만든다고 접근해서 질문을 던지는 수법이 아주 흔하다고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류의 사칭이나 전도는 형사처벌 대상도 아니라고. 내 마음의 상처를 피해사실로 입증할 재간도 없었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없어서, 현실의 나는 결국 '바빠서 못 만날 것 같다-'로 마무리했다. 






멀티탭은 남았고 기프티콘은 사라졌다. 기억도 비슷하다. 좋은 기억은 남았고 나쁜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조사계의 투머치토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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