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배우가 우아하고 고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강성연 배우가 등장해서 매몰찬 말을 퍼붓는다. 회장님은 누워 계신다. 김소연 배우와 홍종현 배우가 진심으로 슬퍼한다. 집 안에서 속상한 김소연 배우에게 최명길 배우가 정성 들인 밥을 차려주었다. 둘 사이가 애틋해 보였다.
"최명길 배우 예쁘다."
"친엄마면서 시숙모야."
잉? 열심히 가족관계도를 떠올려봤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주일 선배인 엄마가 쉽게 설명을 해줬다. 엄마(최명길)가 예전에 딸(김소연)을 낳고 형님(김해숙)한테 맡겨둔 채 결혼을 했는데, 남편 형(동방우)의 아들(홍종현)과 친딸(김소연)이 결혼을 했다는 것. 오..!
친딸은 세 자매 중 둘째였다. 아직 친엄마보다는 키워준 엄마가 더 애틋한 상황인 듯했다. 그들을 인고의 세월을 거쳐 잘 키워낸 김해숙 엄마는 암으로 고생 중.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여긴 철부지 막내딸(김하경)의 결혼식. 엄마는 미소 지으며 마음껏 춤을 췄다. 슬로 모션으로 잡힌 엄마의 춤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엔 눈물이 어렸다. 엄마의 눈에도 간간이 슬픔이 묻어났다.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무리해서 몸을 움직였던 엄마는 결국 그날 밤 탈이 나고 말았다. 신혼여행을 떠나던 막내도 왠지 걱정되는 맘에 신랑(기태영)에게 양해를 구해 친정으로 향했다. 둘째 딸과 막내딸은 서로 엄마 곁에서 자겠다고 다퉜다. 첫째 딸(유선)은 그러지 말라면서도 흐뭇해했다. 그렇게 네 여자는 한 방에 모여 몸을 비비며 행복한 밤을 맞이했다. 엄마도 마냥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새벽녘, 첫째 딸의 꿈에 나타났다. 아빠 보러 가야겠다며 곱게 입술을 물들이고는 이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뽀얀 화면에서부터 이미 시청자들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떠났다.
우리 엄마는, 김해숙 엄마를 부둥켜안고 우는 딸들을 보며 티슈를 뽑아 들었다. 우냐고 놀렸는데 사실 나도 조금 울컥했다.
난 엄마 앞에서 울지 않는다. 11년 전이 마지막이었다.대놓고 운 건 딱 한 번. 2년 전, 집 앞에서였다.
친구들과 공모전에 한창 매달렸던 때였다. 특히 2016년엔굵직한 결과물을 많이 만들어냈다.그간 여기저기에서 입상은 몇 번 했지만 우리는 유의미한 타이틀이 탐났다. 이를테면 대상이라든가 최우수상이라든가 그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금이었다. 온전한 창작자로 살기 위해 우리 팀원들은 늘 투잡을 하고 있었는데, 창작자의 삶이 생업이 되려면 생업보다 더 큰 수익을 공모전에서 먼저 얻어야만 했다. 세상이 우리에게 창작자의 삶을 허락하는지 가늠해 보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그다음의 일은 다음의 문제였다.
그러던 중 우리는 감사하게도 한 영상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6년에 총 3건을 작업했는데 1건은 광탈을 했고, 1건은 공모전이 무산됐으며, 마지막에 완성했던 1건이대상을 받았다. 대상은 두 번의 낙담을 거쳐 가장 나중에 나온 결과였다. 긴 실망 끝에 찾아온 기쁨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다음 해, 무산됐던 공모전이 다시 개최되었다. 당연히 재도전을 했고, 당선작 발표일 이후 공모전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왔다. 장려상을 받으러 오라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좋은 결과로 돌아오니 배로 신났다. 세상으로부터 이 일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다만, 연말 시상식에 직접 참가해야만 한다는 게 조금 걸리는 부분이었다. 우린 모두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지역 공모전이어서 그 지역까지 가는 게 우리로선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부상으로 상금 50만 원도 있었다. 그렇지만 왔다 갔다 하는 경비만 따져도 사라질 수 있는 금액. 팀원 수대로 나누자면 그랬다.
시상식은 금요일 오후였다. 아침 일찍 모여 출발하면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여행한다 생각하고 기분 좋게 다녀오기로 했다. 우린 상이 고팠다.
시상식 날 아침이 되었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가는데 집에서 나오자마자 전화가 왔다. 엄마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시는 분이었다.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무슨 일일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전화를 받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엄마가 연락 없이 회사에 나오지 않았고, 전화도 안 되는 상태라는 소식이었다.
전날 엄마의 연락이 생각났다. 오후 1시쯤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조퇴를 한다고. 집으로 내가 갈까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었다. 약 먹고 잘 쉬라고만 하고 넘겼는데 다음날 출근을 안 했다고 하니 두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건가, 이상하다 싶었다.
외할머니는 혼자 사시다가 집에서 쓰러지신 뒤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의 기억이 무섭게 떠올랐다. 바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세 번 걸어도 안 받았다. 카톡도 보내봤지만 읽을 리가 없었다. 집전화로도 전화를 해봤는데 연결되지 않았다. 당장 엄마 집 동네에 살고 계신 친한 아주머님들께 연락을 드렸다. 내가 집으로 가는 게 가장 빨랐다.
엄마 집과 내가 사는 집은 차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어 꽤 가깝다. 그렇지만 버스로 가면 기다리고 걷는 시간까지 생각했을 때 30분쯤 걸린다. 자가용이 없는 게 한스러웠다.
약속 시간이 다 돼서 친구 둘이 왔다. 난 상황을 알리며나를 빼고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렌터카를 끌고 오던 친구는 잠깐 기다리면 데려다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친구가 도착하려면 5분 이상이 소요될 것 같았다. 시상식 시간에 맞춰 가려면 차는 그때 바로 출발을 해야 했다. 나 때문에 기쁜 날 친구들이 신경을 쓰느라 시상식장에 가지 못해서 상을 받지 못하는 건 싫었다. 그리고 난 1분 1초가 급했다.
극도로 긴장이 됐다. 자꾸 나쁜 생각이 들었다. 빨리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택시를 잡으러 가려던 찰나, 손에 진동이 느껴졌다. 들고 있던 휴대폰에 엄마 이름이 떴다.
반가웠지만 무서웠다. 얼른 받아서 엄마 목소리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망설여졌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일까 봐.
심호흡 한 번 하고, 덜덜 떨면서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었다.
"여보세요?"
"... 어~"
엄마의 목소릴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렸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길에서 마구 울었다. 혼자서도 소리 내서는 잘 울지 않는데, 진짜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엄마는 왜 전화를 안 받어어어엉!!!!!"
승질을 있는 대로 부리면서 꺽꺽댔다. 괜찮냐고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담담했다.
사건의 내막을 들어보니, 전날에도 몸이 안 좋았는데 아침에도 속이 안 좋아서 병원을 갔다는 것. 회사에도 임원들한테는 말을 하고 갔다고 했다. 그 내용을 듣지 못한 회사 아주머님께서 걱정되는 마음에 나한테 연락을 해주신 거였다. 엄마는 아프긴 했지만 내가 상상한 것처럼 쓰러져 실려간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도저히 금방 진정할 수가 없었다.
꾹꾹 눌러둔 트라우마는 가끔 이렇게 나를 휘둘러 놓는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슬슬 민망해졌다. 시상식에 간다고 원피스도 꺼내 입고 화장도 곱게 했는데 눈물 때문에 얼굴이 얼룩덜룩해졌다. 진정하라며 커피를 사주는 친구들 보기도 뭔가 좀 민망했다. 원래 내가 사주려고 한 날이었는데. 렌터카를 운전해서 오는 친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난 실실 웃고 있었다. 퉁퉁 부은 빨간 눈으로.
결과적으로는 아주 큰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오바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내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쳐도, 평소 숨기고 있던 불안을 만천하에 들킨 기분이었다. 엄마에게까지도.
이상한 것은, 엄마도 내가 놀래서 운 걸 알았을 텐데 '뭘 울고 그러냐'는 말이 없었다는 점이다. 모를 수 없을 만큼 크게 울었는데 말이다. 평소에도 내가 조금만 짜증을 내도 성질부린다고 구박하는 엄만데. 그냥 이제 괜찮으니 시상식 잘 다녀오라는 말뿐이었다. 길가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내가 운 걸 몰랐던 건가. 아니면, 엄마도 울음을 참고 있었던 걸까.
김해숙 엄마는 둘째의 친엄마에게 딸의 남은 인생을 잘 돌봐주길 부탁했다. 우리 엄마의 눈물은 거기에서 터진 듯했다. 끝까지 딸들 걱정뿐인 엄마.
엄마에겐 내가 하나뿐인 외동딸이고, 외할머니에게도 우리 엄마는 하나뿐인 고명딸이었다. 엄마는 나를 생각했을까, 외할머니를 생각했을까.